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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Dec 26. 2020

성탄절에 울었다. 싼타 할아버지 선물은 애초에 글렀다.

성경 봉독 담당이어서 성탄절 교회 예배를 갔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성탄절 예배를 갔다' 이렇게만 써도 걸,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왜 굳이 성탄절에 교회를 갔는지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는 요즘 상황이 씁쓸하다. 더 자세하게 해명하자면, 비대면 예배를 유튜브로 송출하는데, 예배에 필요한 최소인원만 모이는 교회를 간 것이다.

덕분에, 한껏 썰렁한 교회에서 마스크 안에서만 맴도는 찬송을 부르는 이색적인 성탄절 예배를 경험했다.


예배 도중 나도 모르는 감정에 북받쳐서 울고 말았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몇 번을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평상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예배였다. 오히려 더 건조했고 온기 없는 예배였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성공회여서 전례가 중요하다.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예배가 진행되는데, 그중에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군가가 당신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긴 적이 있는지?

나는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누구나 고통을 피해 갈 수 없고, 외로움을 면할 수 없다.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겪는지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토로하긴 하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 나만이 온전하게 아는 나를 진심으로 불쌍해하는 이가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아, 예수님이 정말로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시는구나. 내가 힘든 걸 다 아시는구나. 나에게 누군가 '괜찮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를 불쌍하게 보는 이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서 눈물로 나오는 듯했다.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누군가를 '불쌍하다'생각하는 데서 오는 듯하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저 이가 많이 힘들구나. 얼마나 힘들까? 불쌍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 감정. 

흔히 쓰는 표현 중에 '값싼 동정'이라는 말이 있다. 드라마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주인공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주면, 주인공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나는 값싼 동정 따위는 싫다구요'라곤 했다.

내가 느꼈던 예수님이 나를 측은해하는 마음과 값싼 동정과는 무엇이 다를까? 진심으로 애타 하는지 결국은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진심의 정도인가 싶다.

나는 누구에게 진심으로 애타 할까? 그게 내가 받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성탄절날 찔찔 짜면서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계속 북받침이 올라와서 시야가 뿌옇다. 남편도 짠하고, 아들도 불쌍하고, 딸도 안쓰럽고.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은 나를 지켜봐 주시는구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고 했다. 이 속담은 정말로 굶어 본 사람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사람이 동시에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굶지는 않아야 한다고, 최소한 그래야 하지 않겠냐는 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아이들이 학대받지 않아야 한다. 불쌍한 아이들이 계속 나오지 않도록. 그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분노해야 한다.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바꿔야 한다. 아이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어른이 약자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약하다고 아무렇게 해도 내게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나도 힘만 생기면, 나도 어른만 되면 저렇게 갚아 주리라. 힘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런 식으로 커가는 것 같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꾸려나가야 하나? 힘인가? 서로 불쌍하다 생각해 주는 마음인가?

내가 더 힘 있어지려고 모든 애를 쓰는 사회, 나는 힘이 있고 너는 힘이 없고 그거면 된 사회.

나도 불쌍하지만, 너도 불쌍하고 그래서 같이 한바탕 울어주는 사회. 네가 힘든 거 내가 다 안다. 위로해 주는 사회. 힘든 것을 모두 다 비껴갈 수는 없지만, 나 힘든걸 누가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 힘으로 눈물 좀 흘리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울면 안 돼. 우는 아이에겐 산타 할아버지가 서~언물을 안주신대' 노래가 그러니, 나는 올해 산타 할아버지 선물은 글렀다. 하지만, 아주 큰 선물을 받았다. 내가 전적으로 위로받은 느낌. 받은 대로 남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


사족이지만 이 캐롤은 마음에 안 든다. 아이가 울 때마다 도깨비가 와서 잡아간다고 하는 거나, 울면 선물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거나 아이들에게 하는 협박이 아니고 뭘까?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려고만 하지 말고, 왜 우는지 살폈어야 하지 않나. 괜한 캐롤을 다큐로 받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선물을 못 받아서는 아니다.


박효신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다. 그의 노래에도 위로의 힘이 있다. 노래를 하던 글을 쓰던 무슨 일을 하던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모여모여서 우리 사회를 울릴 수 있다면. 그랬으면 한다.

성탄절에는 박효신이지. 그도 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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