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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12. 2021

'미나리',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나는 채소 미나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음식에서 미나리를 일부러 빼내지는 않지만, 내가 요리를 하려고 미나리를 구태여 구입한 적도 없다. 미나리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선호하지도 않는 이유는, 더듬어보면 아마도 예전 가정 시간에 배웠던 미나리 손질법 때문인 것 같다. 미나리에는 거머리가 붙어있어서, 씻을 때 칼이나 쇠 종류를 물에 넣어야 거머리가 떨어진다고 다. 그래서 내게 '미나리'라고 하면 '거머리'가 따라붙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가 학습이 되었나 보다. 요즘에는 미나리가 예전과 다르게 거머리가 없다고 하지만, 이미 학습된 조건반사가 내 미나리 구매를 방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미나리'를 왜 제목으로 썼는지 궁금했다.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는 없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기대하는 바는 있었다.

할머니를 다룬 영화라고 하길래, 간만에 펑펑 울고 나오려나 다. 결론적으로는 중간에 찡한 순간은 있었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나왔다.

할머니가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소재에 최루성 요소를 집어넣는다면, 관객들을 울리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텐데, 이 영화는 '울리고야 말겠어'라는 굳은 의지는 없는 듯이 보였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할머니는 쿨했다.

'나는 음식을 못해'라고 말하는 할머니였고, 손주 혼자 무거운 서랍장을 꺼내다가 발이 다쳤는데도 '아구,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다'자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당해서 좋았다.

몇 년 전에 미국에 출장을 갔을 때, 입국심사 때부터 잘못 말하면 어쩌나,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내가 영어 잘 못한다고 사람들이 비웃을까,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더군다나 영화는 1980년대이고 할 줄 아는 영어 몇 마디 가지고도 전혀 기죽지 않는 할머니의 걸크러쉬가 좋았다.

그랬던 할머니의 두 눈이 공허하게 비어있는 순간이 있었는데, '와, 윤여정이 정말로 연기를 잘하는구나' 싶었다.


이 영화는 기억에 대해서, 냄새에 대해서 말한다.

누구나 어떤 냄새나 바람의 촉감이 가져다주는 기억들이 있다. 얼마 전 유난히 따뜻했던 바람 냄새에, 몇십 년 전 대학교 입학식 때 풍경이 떠올랐다. 대학교 들어간다고 엄마가 사줬던 파란색 골덴 정장을 입고 학교 노천극장에서 덜덜 떨고 있었던 그림.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 그 기억, 미나리에 대한 기억과 냄새.


우리끼리는 잘 모르지만, 한국인에게서는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나.

우리도 외국을 나가면, 그 나라에서 나는 특별한 냄새를 맡곤 한다.

낯선 나라 한국에서 온 할머니에게서 나는 낯선 냄새가 결국에는 손주들에게 익숙해지고 그리워지고 그랬나 보다.


미나리는 향이 독특한 채소이다.

고수를 처음에는 우리가 비누냄새난다고 낯설어하듯이, 미나리도 미국에서는 그저 낯선 냄새를 가진 식물이겠지. 할머니와 같이 그 냄새가 익숙해지고 결국에는 미나리를 맛있게 먹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나 보다.


할머니를 낯설게 보던 시선이 그리움으로 바뀐 때는, 내 생각에는 이 순간인 것 같다.

'누가 감히 우리 새끼를'이라고 할머니가 손주에게 말해주고 안아주었을 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뭉클했던 순간이다.

내가 왜 네 편을 드는이유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아도 되고.

그저 내 새끼니까, 누가 감히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해 봐라. 아주 상대편 머리카락을 다 쥐어 뜯어버리고 말겠다는 마음(정말로 그렇게 한다는 데 한 표).

'사실은 나도 조금은 잘못했는데.'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우리 애가 어떤 앤데 잘못을 했겠냐, 다 그쪽이 잘못한 거지'길길이 날뛰며.

'사실은 저 애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이미 수습은 안되고, 오직 내 새끼만 보이는 100% 편파적인 할머니의 시선.


나도 그런 편파를 받아보고 싶다.

나이 오십이지만, 매일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다지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내 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누가 감히 내 새끼를'이라고 큰 소리로 나를 그저 감싸주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내가 이런저런 잘못을 했어요'라고 고백을 한 뒤라도, '그래도 너는 잘못한 게 없다' 말도 안 되는 두둔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삼겹살이 엄청 땡겼다.

하필이면 되도록 육식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요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미나리와 삼겹살의 조화가 엄청 구미를 당겼지만, 머릿속으로만 지글지글 구워서 한쌈했다.

삼겹살로 영화의 마무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본 후 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아니었을 거야.
농사는 또 실패했을 수도 있고, 가족들은 크고 작게 다투겠지만, 어려울 때는 또 저렇게 바닥에 같이 누워 자면서 어떻게 해결할지를 궁리하겠구나.


어쩌면, 가족이란, 성숙이란 아픔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 가보다. 그렇게 영영 극복하지 못할 것같은 고난 앞에서도,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부자, 가난한 사람 모두 먹을 수 있는 미나리를 보면서 공짜의 위안을 얻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기 전 기대와 전혀 다르게, 영화를 보면서 내 할머니가 생각나지는 않았다.

가족 영화이다. 하지만, 할머니라는 특정한 인물이 생각났다기보다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가족 사이의 일상에서 결국은 무엇이 우리를 묶어주며 지탱하게 하는가를 생각했다.


삼겹살은 패스이지만, 미나리로 유부주머니를 만들어 보아야겠다. 며칠 전 택배비를 안 내보겠다고 유부를 큰 봉지로 5개나 사놓았기 때문이다. 유부에 당면을 넣고 미나리로 둘둘 말아주면 한 동안 좋은 음식재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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