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를 이야기했더니, 고3이라 앉아만 있느라 그렇다며 유산균도 같이 먹으라고 한다. 내가 전혀 모른다는 듯이 반응했더니, 약사가 내게 물어본 말이다. '고3 엄마인데, 애한테 뭘 먹이시나요?', '밥 먹이죠' 쯧쯧쯧 약사가 혀를 차더니 그때부터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고3이면 챙겨 먹여야 하는 4가지가 루틴이다.
첫 번째 유산균은 필수이다. 장운동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일번으로 먹어야 한다.
두 번째는 철분. 여자아이여서 빈혈이 있을 거고, 공부를 하려면 혈액이 잘 돌아야 하는데 철분도 꼭 필요하다.
세 번째는 엽산과 B12을 보조적으로 먹어줘야 한다.
네 번째는 총명탕 뭐 이런 거였는데, 이때쯤엔 내 집중력이 흐트러져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렇게 패키지로 애를 먹여야 하는 건, 대치동 엄마들은 다 아는 거다. 고3 엄마인데, 정말 너무 모르시네.로 끝을 맺는 열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어느새 유산균과 철분약을 두 팔에 안고는 약국 문을 나오고 있었다. '흥, 내가 그렇다고 다 살줄 알고? 두개만 살거야'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알량한 자존심이 작동했다. 나오고 나서보니, 내 자존심을 약사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같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고3 엄마의 자격지심이 건드려진 모양이다.
나는 고3 엄마로서 '딸 눈치보기', '딸이 시켜달라고 한 문제집 주문하기', '딸 눈치보기', '딸이 신청한 봉사 장소 데려다 주기', '딸 눈치보기', 그리고 제일 어려운 '내가 할 수 있으면서도 딸이 맛있다고 할 메뉴 선정하기'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한다.
물론 약사가 말한 대치동 엄마와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고3은 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나는 요청 들어온 것에 대해서 서포트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인, '고3에 목숨 걸지 말자'도 한몫한다.
고3 한 해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는 맞지만, 시험성적이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기회로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을 저마다 다른 종류의 장점을 갖고 있는 아이들로 보아주고, 저마다의 삶의 방향을 응원해 주었으면 한다.
나도 딸이 좋은 시험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생사는 데에 성공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데, 나는 후자의 경우에 더 마음이 쓰인다. 딸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엄마가 응원하고 지지하고, 그 모습 그대로 너무 훌륭하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란다. 고3도 중요하지만, 딸 자체가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솔직히, 나는 내 살 궁리도 바쁘다.
세상에 고3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자기만 생각하는 나쁜 엄마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내 주위에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건강해야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잘 살아야 가족도 케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지금 이 시기에 좋은 가족이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았다.
아직까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 주어야 하지만, 조금씩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을 걸어가고 있고, 아이들이 온전히 독립할 수 있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은 가족이란 생각이다. 이전에는 한 공간에서 서로 치대며 지냈다면, 이제는 서로 각자 알아서 잘 살아가는 모습이 좋은 그림 아닌가 싶다.
고3 엄마로서, 나의 최대 숙제는 영양제도 아니고, 입시도 아닌 까칠해진 딸과의 대화이다.
막상 고3이 닥치고 나니,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스트레스가 심한 모양이다. 어느 날은 말 한마디 걸기도 힘들게 집안 공기를 얼음장으로 만들고, 어느 날은 그나마 좋아져서 옆에 딱 붙어서는 헤헤거린다. 옆에서 보는 나도 힘든데, 본인이 제일 힘들겠지. 안쓰럽고 속상하고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조마조마하고 그렇다.
그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것으로 나는 내 전력을 다하려고 한다. 힘들 때 손을 뻗치면 그곳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알아준다면, 엄마는 언제나 그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준다면 좋겠다.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기분을 파악하고,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잘 이겨내기 위해 느닷없이 노래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