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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Oct 29. 2020

빈 둥지 훈련하기

도비와의 연관성은 과연 무엇?

딸이 기숙사로 돌아갔다.

딸이 재택수업과 현장수업을 격주로 다가, 이번 주는 현장수업이어서 일요일 기숙사로 데려다주었다. 가기 싫다고 안 가면 안되냐고, 안 하던 어린냥을 부리더니 되도록 천천히 운전하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춰보겠다는 심산이다. 나는 '그래' 대답을 건성으로 하고, 딸이 노래 들을 때 슬쩍슬쩍 속도를 높였다. 데려다주는 길은 안 막혀도 돌아오는 길은 늘 막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딸이 현재 다니는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반대했던 이유가 기숙사 때문이었다.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딸을 기숙사에 보내는 게 마음이 안 놓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느낄 리불안이었다. 내가 딸과 헤어질 준비가 안 되었다.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하면서 내가 징징거리면 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일주일에 한 번씩 올 거야. 그리고 다른 엄마들은 다 좋다는데 엄마는 왜 그래?' 

'그 엄마들이 무정한 거지. 어떻게 딸을 보내 놓고 잠이 온대?'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지난 일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평소보다 더 막혀서  간신히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Dobby is free.

해석하면 '앗싸, 자유다.'

이제 늦게 일어나도 되고, 12시 맞춰서 점심 준비 안 해도 되고, 친구와 통화를 크게 해도 된다.  이제 입시가 1년 남은 고2 딸이 공부하는데, 전화 통화하다가 크게 웃었다고 눈총을 있는 대로 받았던 기억이 나서 서럽다.

처음에 기숙사 들어갈 때, 호들갑을 좀 덜 떨었어야 지금 느끼는 자유가 덜 민망할 텐데. 아직도 딸에게는 내가 주중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아들이 분가한 지 한 달째이고, 딸도 기숙사에 가 있으니 남편과 나는 자식들이 독립하고 나간 '빈 둥지'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딸이 주말에는 귀가하니 완벽한 빈 둥지는 아니고 간헐적 빈 둥지 체험기간인 셈이다.

TMI로 도비가 죽었을 때 많이 슬펐다. (사진출처: 블로그 Hi, Bye)


빈 둥지가 좋다.

딸이 집에 있을 때도 시간을 많이 뺏기지는 않지만, 이제는 나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다. 월부터 금까지 온전하게 나로서만 살다가, 주말에 딸에게 집중하는 이 패턴이 썩 마음에 든다. 

입학 초기에는 남들보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새로 시작하는 기숙사와 고등학교 생활로 집에만 오면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주말이 내내 살얼음 판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기숙사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이제야 나도 좀 살겠구나 싶었다. 한 학기 지나고 딸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고, 나도 주중의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가족 발달 과정에 따른 과제들이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고, 내 나이가 되면 아이들은 독립하는 것이 과제이고, 부모들은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이고. 

아이들이 독립적이 될수록, 아이와 엄마의 교집합이 차지하는 넓이를 좁혀나가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만에 그려본 집합인지, 아이∩엄마, 빗금을 치고 보니 '빗금 친 면적을 구하시오' 했던 수학 문제도 생각이 난다. 역시 TMI

조금 샛길로 새자면, 위 그림의 빗금 친 부분을 공집합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공(空)집합이 원소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집합이란 뜻인데, 나는 그것을 공(共)집합, 두 집합이 같이 공유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맞다고 생각했던 단어가 완전한 오답이 되니까, '그럼, 대체 저 빗금은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하는 생각만 나고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록색 창의 도움으로 간신히 '교집합'이란 단어를 찾아냈다.  맙소사, 이러고도 고2 수학 문제를 감히 도와준다고 했다니.


당황스러움이 지나고 나니 문득 질문이 들었다. 왜 서로 지나간다는 뜻의 교(交)집합이라고 부를까?

억지일 수 있지만, '저 그림에서 아이 쪽에서 겹친 부분과 엄마 쪽에서 겹친 부분은 완전히 같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방향이 다르니까. 

아이와 나는 같이 한 시간과 공간은 있지만, 서로의 삶은 다르다. 같은 사건이라도  서로는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삶을  걷는 거고, 나는 내 삶의 길을 걷다가 만나는 지점이 교집합. 어떤 때는 같이 지내다가, 또 어떤 때는 서로 가던 방향대로 길을 가는 것. 교집합을 명명한 사람은 이런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오늘 우연히 집합을 황급히 뒤져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유가 아닌 교차'라.


해리포터 이야기로 넘어가 보면,

도비는 주인에게서 지저분한 양말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도비는 그 이후 본인 자신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게 살았다. 혹시 '엄마들은 마법에 사로 잡혀서 엄마라는 정체성에만 묶여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 도비는 집요정이라 주인이 물건을 줘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나 자신의 주인이므로 언제든지 나를 찾을 수 있다. 정 허전하면 양말 하나 사서 내 손에 쥐어주면 자유다. 


나는 얼마나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나'라는 정체성은 가장 기본이다. '나'없이 '엄마'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엄마 말고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양말이 필요하다면, 나는 포근해 보이는 붉은색 알록이를 선택하겠다.



나는 입체적이다.

'나 자신'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정체성을 밑면으로 해서, '여성'을 붙이고 '엄마'를 추가하고,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붙이다 보면, 각자의 면들이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나올 수도 있다. 지금 빈 둥지 안에 있다면, 이제 곧 닥칠 것이라면, 나의 다양한 모습과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을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어떨까? 

우리는 삶의 주기가 지나치게 가족 위주로만 되어있다. '빈 둥지'도 자녀들이 나간 상실감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가족이 있건 없건, 자식이 독립을 하건 안하건,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잊고 살았고, 떠올리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 자신만의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빈 둥지에서, 나훈아의 '둥지'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다이아몬드는 화려하진 않아도 은은하고,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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