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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Oct 30. 2020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용감한 그녀

힘들 때 성경이 나를 울리고 일으켰다.

교회 신부님이(내가 다니는 교회는 성공회여서 목회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매일 아침 단톡방에 올려주시는 성경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많이도 울고, 위로받았다. 성경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으면, 그 장면이 총천연색으로 내 앞에 나타나고, 글이 펄떡펄떡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게 나만의 방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침묵기도 학교에서 '이냐시오식 묵상'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방법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그의 영성수련에서 권하는 공상 기도의 한 형태로서, 많은 성인들이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기도 방법은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서 한 장면을 택해서 마치 그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듯이 그 장면을 다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앤소니 드 멜로 지음, 출판사 성바오로, p.156)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자 이야기는 나를 가슴 뛰게 한다.

이 이야기를 상상하다 보면 굴곡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을 밀고 나갔던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같은 본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있지만, 좀 더 생생하고 그녀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는 마가복음이 더 좋다.


내 상상 속의 그녀는 이런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면서 무리 지어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자칫하다가 넘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녀는 오늘 이 걸음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지금도 병 때문에 부정한 여자라고 취급받아 살아도 죽은 목숨이다. 물이나 식량을 구하러 다니면, 모두들 그녀를 피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그녀가 앉았던 의자도 부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데도 잠시도 머물지 못한다. 그나마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동네 사람이 멀리서 먹을 것을 던져주면, 황급히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짐승처럼 가져와야 했다.
'저 예수라는 젊은 사람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메시아니 예언자니 하는 소리도 한다. 그런 사람인데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낫겠지. 앞에까지 나갈 수는 없어. 혹시 누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 끌려나가 죽을 수도 있다.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옷자락에 손만 닿으면 돼. 조금만 더 가까이 가야 한다.'
그녀 주위에는 온통 덩치가 큰 사내들 뿐이다. 가뜩이나 열두 해를 병마와 씨름했기 때문에 약해진 몸으로, 이 건장한 사내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거의 쓰러질 뻔했다. 뛰다시피 하는데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나는 그녀의 목숨을 건 용기가 존경스럽다.

아팠던 열두 해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재산도 탕진하고 가족도 떠났을 것이고. 무엇보다 부정하다고 낙인찍히면 누구와 만날 수도, 옷깃이 스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적 고립을 평생 동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녀의 절박한 마음이 떠오른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그러나 확실한 방법. 아무도 그렇게까지 위험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니까. 여자이고 부정하고 아프고 불행한 상황을 맞서 이겨내고 싶은 그녀였으니까 실행에 옮길 수 있지 않았을까?

잔뜩 몸을 숨기며 그 많은 군중 사이에서 어떻게든 예수님 뒷자리로 다가서려고 사력을 다하는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부정한 사람과 닿은 사람도 같이 부정해진다.

레위기 15장에 따르면, 피를 흘리는 여자와 닿은 사람도 같이 부정하다고 여겨진다. 그녀가 예수님 옷자락을 만졌으므로 레위기 대로라면 예수님도 부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도 예수님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라고만 한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레위기를 무시하는 것인가?


율법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정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핵심을 예수님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듯하다. 율법보다 내 옆에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도 그렇게 읽어야 할 것 같다. 말 자체에만 매이지 않고,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원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알려 노력하는 것.


이름이 없는 그녀에게 이름을 선물해 주고 싶다.

누구보다 힘든 삶을 겪었음에도,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붙잡고 일어선 그녀.

예수님을 믿고, 죽을 수도 있었던 걸음을 시작한 그녀.

수많은 군중들의 압박 속에서도 여린 한걸음 한걸음 전심으로 다가갔던 그녀.

이름 모를 그녀에게 '강인'이 어울릴 것 같았다. 누구보다 강인해서.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많은 '강인'님에게 존경을, 아직 삶이 힘들어 누워있는 그녀들에게는 응원을 보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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