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해도 돼.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
'무기력하다'
나는 종종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 다른 나라말로 생각해보곤 한다. 한글 말고 그나마 배운 것이 영어이니 생각해 보면, 'I have no energy.'라는 영작이 나온다. 영 틀린 말 같지는 않지만, 충분하지 않다. 언어가 익숙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고, 내가 겪은 무기력이 단어 하나가 아닌 결국은 풀어써야 할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소파에 몇 시간을 그냥 앉아만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손끝 하나 움직이지를 못한다. 의식 없이 몸져누운 것도 아닌데,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손끝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기(氣)가 단순한 신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인 것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손끝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거기를 통해 내 몸을 흐르는 에너지가 줄줄이 새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쥐어짤 수 없는 행주 같았다. 주말로 미뤄 놓은 회사일은 노트북 안에 고스란히 손도 못 댄 채 있고, 거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질러져 있고, 아이들은 주말에야 얼굴을 보여준 엄마에게 ‘오늘은 뭐 먹어?’라고 물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동시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엄마인데 아이들 밥은 못 해줄 망정, 왜 애들한테 화가 날까? 나 자신이 나쁜 엄마 같았다. 그러면서도 입 하나 떼고 싶지 않았고, 어지러운 집안을 보면서 그걸 못 치우는 나한테 다시 화가 났지만, 일어날 힘은 없어서 아까보다 더 무기력해졌고 나 자신이 더 한심하게 보였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큰일 나지 싶었다. 일도 해야 했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 내가 일어서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심리상담을 일주일마다 신청했고, 병원에 가서 약도 처방받았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결과는 매번 실패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생각만 들고 남도 나도 다 아는 해결책은 소용이 없었다. 출구 없는 터널에 혼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끝도 보이지 않고 나는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힘든 거 알아. 기운을 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모두 다 알고 보면 다 힘들어. 우리보다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나를 위해 그렇게 말하는 지도 안다. 그런데, 하나도 힘이 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그래, 이렇게 회복하지 못하는 건 내가 모자라서구나. 남들은 다 일어서는데 나만 이러는 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하는 생각이 더 나를 몰아세웠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큰일을 낼 것 같아서, 일단 회사부터 쫓기는 사람처럼 그만두었다. 해야 할 일과 그보다 더 많은 못한 일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하다가 갑자기 진공상태가 된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게는 좀 괴상하고 낯설어 보이는 정적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너무 달리기만 했구나. 힘이 부쳐 한번 넘어졌으면 쉬었을 만도 한데, 무릎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또 벌떡 일어나서 절룩거리면서 또 뛰었구나. 이제는 더 이상 못해먹겠다. 몸과 마음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좀 멈추라고. 이 주인 놈아. 네가 멈추지 않으면 내가 고장 나서라도 너를 멈추겠어. 이러다간 모두 죽겠어.' 아니, 이 표현도 틀리다. 내가 언제는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진작부터 쓰러지는 거였는데, 누군가가 응급으로 주사를 맞히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다시 링으로 돌려보낸 거였다. 누가? 내가.
'무기력해도 돼. 그럴만할 자격이 있어'
나는 지쳐 있어 쉬어야 하는데,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셋 초강력 건전지로 교체해서 나를 더 움직이게 하려 했다. 그게 해결책이 아닌데. 내가 무기력한 것이 나를 또 불안하게 만들고, 나는 그러면 안되니까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던 거다. 나는 무기력해도 되는 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인이 비타민 D가 부족하면 무기력할 수 있다고 해서, 피검사를 해 봤더니 정상이 20인데 내 수치는 6이라고 의사가 깜짝 놀란다. 나는 검사 결과가 놀랍기보다는, 그 수치로 언제부터인가 버티고 있었던 내가 안쓰럽고 대견했다. 비타민은 6이라도 있었지, 내 마음이 가진 재고는 바닥인 것을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당연히 더 이상은 못 움직이지. 바닥에 쓰러져서 까딱 못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지. 간신히 누워있는 것도 대단한 거야.' '힘을 내. 왜 이겨내지 못하는 거야'대신에, 나는 이런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껏 무기력하게 지냈다. 낮이고 밤이고 잤다. 새벽에 자다 말고 깨서 예고도 없이 울음이 찾아오면 통곡을 했다. 나 혼자 억울하고 나 혼자 서러운 마음이 들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비타민 D주사 덕분이었는지,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아 3주 만에 그만둔 심리상담 덕분인지, 신경정신과 약 덕분인지 나는 얼마 후에 조금씩 기력을 찾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추천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내 자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고 싶다.
'무기력해도 돼.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