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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Oct 19. 2020

오십에 백수를 하다

내 나이 오십

진작부터 나이는 만으로 세어야지, 무슨 한국 나이가 따로 있냐고 일 년씩을 깎았으니, 만 나이 오십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남들은 아홉 수가 힘들다고, 29에 힘들었다 39에 힘들었다 하던데, 나는 29, 39, 49 모두 덤덤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오십은 달랐다. 신체적으로는 진작부터 온 노안에, 앉았다가 일어날 때면 영차 기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더 큰 문제는 마음이었다. 4-5년 전부터 집에 밀어닥친 어려움을 버티다가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 시름 놓으려 했는데, 지금에서야 탈이 났다. 

너무 힘들 때는 오히려 쓰러질 수가 없었다. 내가 쓰러지면 정말로 집이 풍비박산이 날 것 같아서, 폭풍 속에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렇게 흔들리면서 버텼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마치 나는 아무 힘이 없어서 털썩 쓰러질 만도 한데, 폭풍우가 사방에서 나를 들어 올려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침이면 눈이 떠지니까 그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폭풍우가 잠잠해진 요즘 내가 쓰러졌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중에는 간신히 직장을 나갔지만, 주말에는 열 손가락 끝까지 아무 힘이 없어서 이틀을 꼬박 누워만 있었다. 누워만 있으니까 계속 잠만 잤다. 낮잠을 하루에 두 번도 자고, 밤에도 또 잤다. 집은 거의 폭탄 맞은 수준이었지만, 내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 정신없는 집구석을 보는 것이 또다시 나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했다. ‘저걸 치워야 하는데, 내가 이러고 있구나.’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나 하나도 문제지만, 회사에 피해를 주겠다 싶어서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 나는 오십에 백수가 되었다.

대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했고, 병원에서 5년 이후 회사로 옮겨서 21년 일했고, 2년 공부했고, 이번 회사에서는 8개월 남짓. 지금까지 28년을 일을 하던 공부를 하던 무언가를 하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아침에 갈 곳이 없는 백수가 되었다. 처음 기분은 방학을 맞은 학생 같았다. 그동안 밀렸던 일을 해야지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밀린 청소도 하고, 책도 읽고,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커피도 마시고, 나름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림을 하나씩 실현시키는 재미가 쏠쏠했다. 백수 한 달 차.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아무 목적 없이 사는 사람 같아 보였고, 시간을 보내기가 금세 지루해졌다.


그러다가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나를 쓰레기집 청소하는 동영상으로 이끌었다. 내가 ‘무기력’을 검색했더니, 유튜브가 나를 ‘청소하면 어떻겠니?’ 하며 보여준 것 같다. 나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겪고 있는 무기력에서 많이도 아니고 한 발만 더 나가면 나도 그들과 같았다. 내가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을 알지만, 그걸 못하는 마음, 또 그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더 무기력해지는 악순환. 정말로 힘들 때는 정답을 다 알면서도 그것을 위해 움직일 하나의 힘이 없다. 그럴 때 청소 업체에서 그들을 도와줬고,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던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영상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나 같아서.


다행히 나에게는 힘이 딱 하나 남아있었다. 그걸로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장소가 어딘지 찾아보았고, 거기는 안방 화장실이었다. 청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화장실 선반에 있던 물건만 정리를 했다. 첫 시작이 좋았다. 필요 없는 물건들이 버려지고 나니, 정리된 선반이 내 마음 같아서 좋았다. 그 뒤로 정말 열심히도 버렸다. 집안 곳곳을 뒤지다 보니, 어디서 이런 물건들이 나오며 이 집에 이사 온 10년 동안 있는지도 몰랐나 싶었다. 20년 전 신혼 가전으로 샀던 튀김기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안 맞아 버리려다가 살 빼면 입어야지 하며 매번 부활하여 옷장으로 다시 들어갔던 옷들도 과감히 버려졌다. 책도 많이 버리면서, 내가 정말로 책을 읽고 싶어서 사기도 했지만, 나의 허한 마음을 달래려고 책을 모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건을 비우면서 마음이 많이 비워졌다.

‘잘해야지’하는 마음. 잘하면 좋지만, 잘 못할 수도 있어. 나는 생각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닌가 봐. 뭐 어때?

‘행복해야만 해. 불행할 수 없어’하는 마음. 힘든 일을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불행한 때가 있다고 해서 그걸 피해 갈 수는 있나? 내게 닥친 일들을 단편적으로 이건 행복이나 불행이야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과 불행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차하며 큰 그림을 만들고 있고, 어떻게 그려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뭐라도 해야 해’하는 마음. 지금까지 많이 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잠시 멈춰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백수를 하고 있다.

인간 수명이 백세라고 하니, 나는 정확히 반을 지나고 있다. 그 시점에 우연히 나는 백수가 되었다. 백수는 무슨 뜻일까? 한자를 찾아보니, 흰 백에 손 수를 쓴다. 나이 오십에 처음 백수가 되어서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나는 백수라는 일을 하고 있다. 하얀 손으로 물건을 비우고 비운 공간 앞에 서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마도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백수를 열심히 해 보리라. 규칙적으로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일어나고, 꼬박꼬박 낮잠도 자고, 엎드려서 세상 불량한 자세로 책도 보고, 무엇보다 굳이 채우려고 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서서히 비운 자리를 그저 비운 채로 두고. 그렇게 지내보리라.

오랜만에 이렇게 세운 계획을 착실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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