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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14. 2020

강아지는 털빨, 사람은?

강아지가 미용을 하고 났더니 환골탈태했다.

다니던 병원에 미용 예약을 하려니 한 달도 넘게 기다려야 해서, 집 근처로 처음 갔는데 거기 미용 선생님 솜씨가 좋은가보다. 그동안 꼬질꼬질하게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비포 & 애프터의 차이가 큰 것도 한몫을 한 듯하다. 

생각해 보니, 강아지의 외모를 결정하는 건 9할이 털 아닐까? 사람처럼 옷을 바꿔 입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털 길이와 모양을 어떻게 다듬냐에 따라 생김새가 결정된다.


사람은 어떤가? 우리도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나면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입고 있는 옷, 체형, 외모가 보이는 모습을 많이 결정한다.

 

어렸을 때 내 얼굴을 눈을 감고 손으로 만져 보았던 기억이 있다.  눈두덩 근처를 만지면 푹 꺼지는 부분이 있다. '여기가 해골에서 뻥 뚫려있는 눈 부위에 해당하는 거구나.'  섬뜩한 상상이긴 했으나, 뼈 위에 몇 센티, 몇 밀리미터의 지방, 근육의 차이가 우리의 외모를 결정한다는 걸 생각하고는 허무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겉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를 알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차지하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내게는 외모보다는 인상이 중요하다.

물론 외모도 인상에 영향을 주지만 그 사람이 표현하는 감정, 생각, 태도가 녹아있는 인상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삶에는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런 게 더 궁금해졌다.

차려입은 옷과 치장에는 눈이 덜 가게 되었다. 그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죽이니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다. 그래서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보게 되면, 겉모습이 바뀌었을 때  한 사람에 대해서 일관되게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예전에 다니던 회사 근처에서, 출퇴근 시에 마주치던 노년의 여성이 생각난다.

하나로 묶은 은발머리, 호리호리한 몸매에 어울리게 입은 패션감각이 매우 신선하고 놀라웠다. 원색의 옷을 조화롭게 입고 스타킹까지 신경을 쓴 매무새가 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원래 명품에는 문외한이라, 그녀가 입은 옷이 명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옷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이 내게는 꽤나 인상 깊었다. 나도 저렇게 나를 표현하고, 자유롭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으로 매겨지는 옷이나 액세서리보다는 자신감, 나를 표현하는 나다운 방식 그런 게 꽂힌다. 요즘은.


'열흘 붉은 꽃 없다'

나 자신을 보이는 대로만 정의한다면, 젊음도 변하고 더 이상 나 자신이 화려하지 않을 때에는 무엇이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멀어져 가는 젊음을 억지로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쓸 것인지, 더 이상 내게는 없는 붉은색에만 고집할 것인지? 모두가 나이가 드는 당연한 이치 앞에서, 거기에 저항하는 게 얼마나 의미있는지, 결국은 시간 앞에 무릎 꿇을 때가 올 텐데, 그때의 상실은 어떨지?

젊게 보이는 것도 중요할 테지만, 좋게 나이 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오는 늙음을 인정하고, 늙어가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는 세상 한 구석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고민해 보려고 한다.


나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살피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더 빛을 발할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 모두 지혜롭지는 않지만, 자신과 남을 살피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다.


오십에 나의 장래 희망은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내 바람대로 내가 좋게 나이 들고, 더 지혜로워진다면, 그래서 나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도 필요하고 할머니도 필요하다.


엄마일 때처럼 불안해하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고, 한 발 떨어져서 아이들을 그저 '예쁘다'해 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는 엄마가 아이를 야단치고 나면, 아이의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고 몰래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것 하나 입에 쓱 넣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이가 세상에서 추울 때, 아무도 자기편이 아니라고 느낄 때, 무조건 자기편이 되어주는 할머니에게 와서 말없이 안기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무슨 사정이었는지 채 듣기도 전에, 누가 우리 새끼를 못살게 구냐며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다짜고짜 혼을 낼 태세를 갖추고,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향해 욕을 있는 대로 퍼주고,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무조건 네가 옳다고 말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에는, 매일 굶고 다녔던 것처럼 어디라도 마르지 않았나 매섭게 쳐다보고는, 우리 새끼 밥 먹인다고 또 한바탕 부엌을 뒤집어 놓고는 더 먹어라, 더 먹어라 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강아지로 시작해서 할머니까지 멀리도 왔다. 강아지나 할머니나 안으면 따뜻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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