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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16. 2020

나이 드는게 좋다.

며칠 전 이전 회사 동료와 통화를 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 첫 안부가 '어디 새로 아픈 데는 없어요?'이다. 이미 여러 군데 삐그덕 거리는 건 서로 알고 있으므로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는 진부한 인사말이다. 옛날 건 받고, 새롭게 아픈 곳만 취급한다. 나는 좀 생각하다가, '새로 아픈 데는 없고, 이전 건 진행 중이에요.'라고 답했다. 좋은 근황인지 나쁜 근황인지 모르겠다.


노안은 40대부터 시작되었다.

핸드폰 볼 때 안경을 벗는 게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으로 핸드폰의 글씨 폰트는 제일 크게로 하지 않았다. 안경을 벗는 한이 있어도 글씨 크기를 늘이고 싶지는 않다. 뭔 개도 안 물어갈 자존심인지 모르겠다.

다초점 안경을 쓰면 일상생활에는 불편함이 없으니 노안은 가장 임팩이 적은 것 같기도 한데, 책의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이건 큰일이다. 볼 책이 얼마나 많은데,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은 책상 위에 쌓인 책들 중에 뭐라고 하나 해결을 해야겠다. 요즘 읽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이것도 조급함이다. 뭐라도 읽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부채. 그 부채를 들여다본다. 나는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아마, 내게는 책읽기가 도망쳐서 숨을 수 있는 안식처 같은가 보다.

'과유불급' 최근에 사놓은 책더미를 보면서 나는 책 읽기를 즐기고 있는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에 쫓기고 있는지 나를 살펴본다.


주름은 내 나이와 어울린다.

주름은 내가 걸어온 삶의 누적이다. 내가 얼마나 웃었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내 감정과 그에 따른 얼굴표정이 얼굴 근육을 움직였을 테고, 피부가 접히고 펴짐에 따라 주름이 만들어졌을 거다. 눈밑의 주름 하나는 아들이 마음고생시켰을 때, 혼자서 꾸역꾸역 삼켰던 오열이 만들었겠다. 눈가의 주름 하나는 그 아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잡아주었을 때, 마음 한 구석이 짜릿하면서 파르르 떨렸던 눈가가 만들었겠다.

주름은 내 삶의 무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늬를 지우면 내 슬픔과 기쁨을 지우는 것 같아, 나는 그냥 두려 한다. 그리고 볼 때마다, 앞으로 다가올 삶이 만들어 낼 주름을 생각해보겠다. 내 삶에  잠복해 있는 고통들,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만나게 될 수 있는 행운들, 내 아이들 앞에 펼쳐질 미래, 나의 미래. 그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과 연결된 주름도 내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오십견은 조금 좋아진 듯하다.

하지만, 아직도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계속 신경이 쓰인다.  어떻게 하면 아픈지 아니까, 살살 움직이게 되고 그래도 불편하면 '아, 거기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의사 선생님이 어깨 모형을 가리키면서 이게 무슨 근육인데 왜 아픈 거고 설명을 해 주었는데 당연히 명칭은 잊어버렸고, 그 아무개 어깨 근육이 내가 그 곳을 쓸 때마다, 자기 거기 있다고, 좀 아프다고 소리친다.

아파야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어깨 근육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아프지 않았다면 아무개 씨가 거기에 있는지 내가 신경이나 썼겠나. 마음도 아파봐야 아프다는 사실을,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어깨를 움직여가면서 아픈 지점을 찾듯이, 마음이 아프면 왜 아픈지, 언제부터였는지 살펴야 한다. 좋은 상담을 받아도, 결국 나를 깨닫는 건  몫이다.  바쁘게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자.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거다. 들어주고, 그러냐고 알아주자. 그 다음은 또 내 마음이 알아서 할 거다.


어제 점심 먹은 건 1분 정도 있어야 기억이 난다.

사람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건 한참 되었다. 연예인 이름이라도 말해야 하면, 스무고개를 해야 한다. '아, 왜 거 있잖아. 현빈이랑 드라마 같이 했던 여배우인데.' '무슨 드라마?', '드라마 이름이 생각이 안나지. 재벌이고 북한에 갔는데', '아, 사랑의 불시착? 손예진?', '아, 맞아 손예진' '근데 손예진이 왜?' 이제야 본론이다. '아, 그 손예진이 했던 영화인데 좀 됐는데 거기서 예뻤다고.' '그 영화는 뭔데?'  두 번째 스무고개이다.  '아, 첫사랑인가? 그거 교복 입고 예뻤는데.', '아, 클래식?' 그냥, 초록색 창에 검색하면 빠르겠는데, 여기서도 뭔 놈의 자존심인지 결국 이런 시트콤을 찍으면서 기어이 알아내고는 바보같이 좋단다. 이게 좋아할 일인가?



나이가 드니까,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이 모두 아련해진다. 호숫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그 본색을 다 드러내지 않고 부분 부분 희미하게만 보여준다. 지나간 일, 기뻤던 일, 슬펐던 일이 공평하게 희미해진다. 그러면서 세상살이에 좀 담담해지는 것 같다. 지금은 폭풍우 같아도 지나고 나면, 이것도 그냥 비바람 같아지겠지. 지금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도, 이것도 그냥 한낮의 햇살 같아지겠지.

젊었을 때 그 폭발하는 감정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삶이 무르익어질까? 생각해본다. 감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잊히지 않는 게 평생 간다면, 그 격렬한 감정에 내가 부서지지 않을까? 적당히 무뎌지는 것, 적당히 잊고 사는 것. 이게 인생에 필요하니까 세월이 내게 준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젊어서 치열하고, 나이 들어 담담하고. 물론, 나이 들어도 치열하다면, 그는 아직 젊음일 거다.  


사는 게 많이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서 젊었을 때 느끼지 못했을 부분에 많이 공감한다. 특히 삶에서 겪는 고통, 고민하고 반복하는 질문, 내가 통제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재미있다. 젊었을 때는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고, 주어진 태스크에 필요한 것만 배웠다. 지금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 내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들을 배우니까 신이 난다. 앞으로 내가 전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젊었을 때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내 나이 되어서 삶의 파도를 어느 정도 거치고 나서 궁금해졌으므로, 지금 시작하는 게 맞다.  이 공부를 끝낸다는 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만 어느 정도나 가까이 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다. 몇 년 안에 끝내야 하는 공부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고.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질문하면서 뒤져보면서 그렇게 가는 게 내 바람이다.


내 몸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기저기 아팠을 때야 신경을 쓰게 되어서 내 몸에 미안하다. 좀 더 살폈어야 하는데.

오래전에 읽었던 '개미'라는 소설에서, 개미가 암을 치료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암세포와 대화하는 것이었다. 암세포와 대화해서 설득하기. 정말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에 깜짝 놀라서 아직도 기억하는 부분.

나도 내 몸에게 말을 건네보고, 내 몸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들어본다.


오른쪽 엉덩이 쪽은 왜 계속 불편한지? 거기를 달래주고 걸어본다.

오른쪽 손목은 왜 가끔씩 시큰거리는지?  내가 좋아해서 지금까지 사 모았던 시계는 이제 다 소용이 없다. 대신, 마우스를 왼쪽으로 사용해본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이제는 익숙하다. 이제야 컴퓨터의 주요 기능들이 오른쪽에 몰려있어서 마우스가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멀다는 걸 깨닫는다. 오른쪽 손목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왼손잡이들이여, 파이팅.

신기하게도, 몸에 집중을 하면 마음도 편해지는 걸 느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건 몸과 마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거구나.

오늘부터 걸어보리라 다짐을 해본다. 그동안 못 본 척 외면했던 내 뱃살과 얇아진 다리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걸을 때 내 몸이 내게 하는 말을 들어보겠다. 고통에 겨운 외침일지, 활기찬 응원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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