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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20. 2020

네 번째 직장 D-3

석 달 차 초보 백수이다.

지난 직장을 그만두면서 두 달째 집에서 놀고 있다. 처음에는 오십 평생 안 해봤는데 백수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회사 다니면서 주말에는 방전된 상태로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그때의 연장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의욕에 차서 집안에 필요 없는 물건을 죄다 끄집어내어서 정리를 했다. 아름다운 가게에 족히 30박스 정도는 보낸 것 같다. 신혼 때부터 있던 튀김기(한 번도 열지도 않고 상자째로 있었다), 십 년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릇, 이제는 안 읽는 책, 언제 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인테리어 소품. 꽂히면 미친 듯이 하는 그놈의 병 때문에 매일매일 온 집안을 뒤지고 바리바리 싸서 내놓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샀던 Wi-fit를 없앴더니 거실이 넓어졌다. 책을 버렸더니 거실에 자질구레한 물건이 책장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거실이 깨끗해졌다. 옷과 침구를 정리했더니, 이제는 옷장 하나는 비어있다. 숨이 좀 쉬어졌다.


물건을 비우면서, 마음도 많이 비웠다.

'내가 몇 년 뒤에 버릴 쓰레기를 돈 주고 사서 모으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나라도 살 때는 신중해야지 싶었다.

내가 사모은 책을 보면서, 내가 어디에 불안했는지를 보게 되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고 싶고, 뭔지 모를 허전함도 충족시키고 싶어서 이것저것 샀던 책. 그 책을 사고 나서 나는 마음이 편해졌나? '아니오'라는 대답이 책을 계속 버리면서 나왔다. 책을 사서 일이 해결되었으면, 내가 이렇게 책을 사모으지는 않았겠지.


다만, 아직도 태스크 없는 삶이 익숙치 않다.

아들은 나한테 시체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그러기가 더 쉽지가 않다. 평생을 '무언가'를 늘 하던 사람이다. 지금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싶은 마음을 갖고 빈둥거리고 있다. 대학교 졸업하고 28년 만에 고작 두 달 이러고 있다고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결국은 '뭐라도'할 일을 기어이 찾아낸 셈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내가 어디에 '쓰여야'할지가 떠오르지 않는 공백이 나는 불편했다.

내 프사에 '하느님의 뜻대로, 내 그릇대로'라는 말이 쓰여있다. 내 좌우명 비슷한 말이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 내가 불안했던 건,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못 찾아서였던 것 같다. 뭔가 되게 심오한 것 같지만, 우리 모두 갖고 있는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 아닐까? 아이를 열심히 키우고, 회사일을 열심히 한다. 그래서 뭐?

젊었을 때는 가정을 꾸리고 보살피는 데에 많은 에너지와 의미를 쏟았다. 그 일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내 삶 전체의 목표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닐 거라는 거다. 아이들을 다 키우면, 그다음에 나는 없어지는 건지?  회사일도 비슷하다. 일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요즘 '회사일=나 자신'이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계속해서 내가 도저히 모르겠는, 그렇지만 알고 싶은, 내 마음에 구멍 하나가 계속 메워지지 않는 채로 있으면서, 답을 찾아보고자 이런저런 생각과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고 해답이 갑자기 짜잔 하고 튀어나온 건 아니다. 다만, 프사에 있는 말처럼 하느님이 나한테 뜻하시는 게 있겠지, 그럼 나는 그걸 잘 들었다가 그대로 하면 되겠지 하는 믿는 구석이 생겼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세운 거창한 인생 계획이 조금씩 시들해졌다. 열심히 계획을 세운만큼 잘 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인생에 숨어있는 일이 언제고 터질 수 있고, 그런 일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살고 있느냐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뭔가를 시작하고, 중요한 선택을 하는일이 예전보다 덜 두렵다. 이 속에서 나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있겠지 생각하면 두려움보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 길 위에서 내가 어딘가에 나만의 그릇대로 쓰인다면, 내가 이전에 느꼈던 마음속 구멍은 잘 메워지고 있는 거다. 그걸 아마도 살면서 느끼는 충족감이라고 하는 것 같다.


오늘이 내 생에서 네 번째 직장 D-3일이다.

저번 직장을 그만두면서, '앞으로 내 인생에 직장은 없어'라고 단언했는데, 그러지 말걸 그랬다. 인생에서 '단언'이라니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쉬려고 고사했던 곳에서 계속 요청이 들어와서, 결국은 두달만에 다시 일을 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내가 충분히 쉰 걸까? 또 탈진이 되면 어쩌나?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나는 '균형을 맞춘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내 실상은 그러지 못해서 아마 더 그 말에 끌리는 것 같다. 지난번에 완전히 뻗었던 걸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균형을 맞추어 보리라 다짐해본다. 워라밸, 내 삶의 목적과 일과의 균형,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균형.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방향을 잘 보고 가고 있는지 더 살펴야겠다.


책상 위에 놓인, 지난번 수업에서 그렸던 수국 그림에 자꾸 눈이 간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그려서이기도 하고, 서툰 붓질 하나, 어쩌다 잘 그린 붓질 하나에 애정이 많이 간다. 계속 그려보리라. 그림도 인생도.

무엇하나 정해진 건 없지만, 그게 또 인생의 묘미 아닐까? 이제는 일을 다 잘 해내겠다 하는 욕심이 많이 없어졌다. 내가 그림 그림처럼, 서툰 부분도 있고 좋은 부분도 있고. 다만, 어떤 마음으로 내 생을 바라보면서 살아갈지, 그 바라봄이 있는지의 문제인 것 같다.

이제는 뛰지만 않고 자주 멈추면서, 지나온 길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물어보면서, 그렇게 살아보겠다. 그렇게 살다가 문득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세상 어디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아차리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이전처럼 촘촘하게 무엇을 할지 계획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게 두리뭉실한 내 삶의 계획이다.


삼일 뒤 새로운 빈 종이 앞에서 붓을 든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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