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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21. 2020

비우다

무기력이 한참 심했을 때, 우연히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았다.

아마 내가 '무기력'을 검색해 보았더니 관련 영상이라고 뜬 것 같다. 쓰레기 집을 청소해주는 업체가 올리는 동영상이었다. 살고 있는 곳이 쓰레기 집인 사람들이 신청을 하면 무료로 집을 청소해주었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대단했다. 문을 열고 진입부터가 난제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먹고 자고 지내고 있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쓰레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는데, 전문가인 그들도 쓰레기 산을 뒤져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화면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악취와 싸우면서, 이웃집에서 원성을 들을까 싶어 창문도 못 열고 그들은 집을 청소해 주었다.

요즘 인기 있는 '신박한 정리'프로그램은 어수선한 집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것에서 비포 앤 애프터가 주는 희열을 준다. 이 동영상을 보다 보면 그런 비슷한 희열이 느껴진다. 비록 어떤 인테리어를 하거나 공간이 예쁘게 변신하지는 않지만, 그 많던 쓰레기가 치워져 나가고 빈 공간이 드러나는 걸 보면, 내 막힌 속도 뚫린 것 같이 시원해진다.


사연을 신청한 주인공은 대개 마음이 아팠다.

인생에서 크게 상처를 받은 사람, 무기력한데 그걸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자기 자신이 싫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 물건을 버리면 자기 자신도 버려지는 것 같아서 쓰레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 강박적으로 아무 물건이나 사 모으고는 상자째 쌓아만 두고 있는 사람. 그 물건이 뭔지, 언제 샀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무언지도 모르는 물건이 쌓여 있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이다.


나도 비슷했다. 영상에 소개되는 사람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과 나는 한 뼘 차이였다.

집안은 점점 지저분해지고 물건들이 널려있는데,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가 비유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맞는 표현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집안이 지저분한 게 눈에 띄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서도 짜증이 나고, 알면서도 일어서지 못하는 나한테 또 화가 났다. 악순환은 계속되어, 집은 점점 지저분해졌고, 나는 더더 무기력해졌다.


동영상을 계속 보다가 문득 생각을 했다.

무기력과 집이 지저분한 게 상관관계가 있다면 거꾸로 집을 청소를 하면 무기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한 번에 모든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고,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공간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았다. 화장실, 그중에서도 안방 화장실에 있는 세면대가 가장 작은 공간이었다. 거기만 일단 치워보기로 했다. 오분도 안 걸린 것 같다. 너저분하게 밖에 나와있던 필요 없는 물건을 장 안에 넣기만 했다. 그리고 나니, 칫솔통이 지저분한 게 눈에 띄어서 그걸 닦고, 또 그러고 났더니 세면대가 더러워서 한 번 닦았을 뿐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내가 이 작은 공간이라도 치웠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화장실을 시작으로 온 집안을 탈탈 털어서 몇 달을 많이도 버리고 치웠다. 버리려고 모아둔 상자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는 짐도 같이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집안 구석에 처박혀 있어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 필요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을 버리면서 나도 역시 쓰레기와 같이 살고 있었음을 알았다.

언제 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한 번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물건을 버리면서 생각했다. 이걸 사면서 나는 이 물건으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 행복이 얼마나 갔을까? 나는 이 물건을 사자마자 잊어버렸는데 말이다. 그렇게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고, 내 손에 들어왔을 순간에 가졌던 만족감을 구매했다. 하지만, 곧 그 만족감은 없어졌고, 지금 그 물건을 버리면서 나는 행복하고 씁쓸하다.


비우면서 빈 공간이 많아지는 만큼 행복해졌다.

우리 집 거실이 이렇게 넓었나? 새삼 놀라웠다. 바닥에 깔려있던 Wi-fit도 버리고, 늘 펼쳐져 있던 빨래 건조대도 접어놓으니 거실에서 축구를 해도 될 정도였다.

책장에 남는 공간이 생겼다. 이제는 보지 않을 책을 많이 버리고 내가 지금 읽을 책과 나중에 볼 책을 공간에 따라 분류하고 나니, 책장이 남는다.


이제는 읽어가는 속도에 맞춰서 책을 사겠다 다짐했는데, 벌써부터 한 달 사이에 산 책만도 세권, 하나도 장바구니에 넣고 매일 고민 중이다. 또 책을 사모으고 있구나 알아차렸으니, 왜 그렇게 또 책을 사려고 하는지 그 마음을 보면 된다. 일 년을 휴학하고 이제 내년 봄에 복학하려고 하는 내 공부가 많이 뒤처져 있지 않은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조바심 내지 말자.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 걱정할 시간에 한 장씩 읽다 보면 되겠지. 새롭게 조우한 불안한 마음과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옷을 버리고 나니, 입을 옷들이 더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입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다가 계절 지나고 옷을 정리할 때마다 '아, 이 옷이 있었네.' 했던 옷을 다 버렸다. 젊었을 때 열심히 입었던 옷, 아까워서 걸어만 놓았던 옷도 버렸다. '이 옷을 입고 다닐 때, 예뻤는데'하며 지난날 젊음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도로 걸어 놓았나 보다. 그렇게 십 년에 한번 추억을 회상하기보다는 옷장에 빈 공간을 선물하기로 했다.

옷장이 드문드문해지니까 나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 이제부터는 빡빡하게 살지 말자. 좀 헐렁하게 살고, 지나가버린 맞지 않는 내게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내게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 발을 떼기도 힘든 사람도 있다.

나는 다행히도 시작할 힘이 남아있었지만, 그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 무기력이 심하면 도와달라고 손을 뻗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이들도 누군가가 도와주면,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마다 가진 재능이 다르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를 만큼 지쳐있는 누군가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어떻게 힘들다 소리도 못 내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내가 줄 수 있는 부분을 나눠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필연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그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내가 우연히 건넨 작은 도움이 그 사람에게는 큰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해본다. 내 안방 작은 화장실에서 벌어졌던 작은 변화가 나를 일으킨 것처럼.


좀 더 주위를 살펴보리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해도 지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는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슬픈 눈빛을 멍하니 갖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내 작은 재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지는 않은지.

목적을 갖고 바라보면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 도움이 필요한 대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나눌 수 있는 하나만큼, 모두 곱하기 하나인 모두만큼 세상이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버릴 물건도 없다.

몇 달을 버리고 또 버렸더니, 멀쩡한 물건까지 버려서 이제 와서 새로 사야 될 만큼 버렸더니, 더 이상은 버릴 건 없다. 남편이 쓰는 면도기 충전기도 버려버렸다. 내게는 그저 이제는 구식이 된 이전 핸드폰 충전기처럼 보여서 같이 싹 다 버렸는데, 나중에 남편이 그것도 버렸냐고 물어보길래 일단은 잡아뗐다. 하지만, 나밖에는 용의자가 없어서 내가 자백하지않아도 범인은 나로 굳혀진 듯하다. 공식적으로는 미결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모르쇠 하려고 한다.


이제는 듬성듬성 비어있는 빈 공간과 물건들을 다시 정리할 시간이다. 어디를 비워야 할지, 어디를 채워야 할지, 무엇으로 채울지.

물건을 비우면서, 나의 조급함과 불안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 정체를 바로 보았다고 없어지지는 않는 질긴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제 알아차릴 때와 그 존재도 모를 때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 내가 불안하구나'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요즘 무엇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할 공부에 대한 부담. 또다시 고개를 드는 '잘해야지'하는 욕심. 아마 이대로 두면, 나는 또 나를 채찍질하면서 달리기만 하다가 또 한 번 넘어질 거다. '워워'내게 '잠시 멈춤'신호판을 들어 보인다. 하나씩 하자. 한 번에 여러 길을 동시에 달릴 수는 없다. 하나씩 천천히 주위도 돌아보면서 그렇게 가자. 출발 신호도 듣지 않고 뛰쳐나가려는 내 옷자락을 뒤에서 잡아본다. '그러다가 너 또 넘어져'


버리는 마음까지 버리려고 해 본다.

한참 버리고 났더니, 버릴 게 없는 지금 되려 공허하다. '버리려는 마음'으로 또 가득 찼나 보다. 이제는 '버리려는 마음' 그것마저 멈춰본다.

빈 공간을 비어있는 채로 두고, 다시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을 멈추고, 물건으로 채울 수 없는 만족감을 찾아보려고 한다.

내가 존재하는 의미,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내가 건네는 말과 행동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닿아있을지를 생각해본다.  그 삶의 '목적'으로 내 빈 공간을 채워볼까 한다. 아마도 그 '목적'은 어딘가가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는 것 같다.


비워야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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