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 식탁 옆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다른 하루는 아니었다. 어제와 같게 막막했고, 어제와 같은 정도로 참담했다.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고통이 끝이 없어 보였고, 이 폭풍 한가운데에 서서 오롯이 견디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절망스러웠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를 아득하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끝은 있으려나?’ 내가 내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이 거꾸로 나를 놀라게 했다. 너무나도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서, 너무나도 당연해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대학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 안에서 시동을 걸 생각도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큰 아이 신경정신과 외래를 나만 혼자 다닌 지가 꽤 되었다. 본인은 올 생각을 안 하지만 약은 꼬박꼬박 먹으니, 나라도 다니면서 약을 타고 있다. 무슨 말을 의사 선생님한테 들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히 좋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는 경과였던 것 같다. 그냥 평소처럼 약을 타고, 이제 시동 걸고 집에 와야 되는데, 갑자기 복받친 울음이 끝이 없었다. 울음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울게 만드는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둑이 무너지듯이 그렇게 무너지면서 우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울면서 운전을 했다. 당연히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무얼 생각한다는 기능이 고장 나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와이퍼를 아무리 빨리 작동시켜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것처럼, 눈물이 계속 나면서 운전을 하니 노상 시야가 뿌옇게 된 채였다. 이러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교통사고가 내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니, 그때 사인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야.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도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거였어. 살아 있는 것과 죽는 것이 1초도 아닌 시간의 차이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눈물은 그쳐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흐느끼다가 지하주차장 기둥을 차 옆구리로 크게 긁었다. 다른 일로 차를 수리하러 갔을 때, 카센터 직원이 말했다. ‘이거 고치세요. 이렇게 차가 긁힌 채로 있으면, 다른 차들이 더 우습게 봐요.’ 그냥 ‘네’하고 답만 하고 생각했다. ‘이전에 아팠고, 아직 채 낫지 않는 제 상처예요. 이 상처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요.’
‘터널을 지나오다.’
둘째 아이 학교를 데려다주었다. 주말마다 가는 길이니 어디쯤에서 막히는지, 어디만 지나면 뚫리는지 훤하다. 유난히 터널이 많은 길이다. 그중에 긴 터널도 이 커브를 돌면 입구가 나온다는 것을 나는 미리 안다. 삶 속에 있는 터널은 완전히 다르다. 조명도 없고 앞도 뒤도 모르겠고, 도대체 끝은 있는 것인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하나의 터널을 2년 동안 지나서 나왔다. 2년 전 일이다. 하지만, 터널들은 계속 있었고, 여전히 나는 우왕좌왕한다. 힘든 일을 겪었다고 해서 갑자기 혜안이 생긴다거나 현자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다른 이들이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터널 속에서 어떻게 헤쳐 나오는지, 내가 받았던 위안과 도움이 그들에게 쓸모 있지는 않을지? 내가 느꼈던 불안, 공포, 무기력함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 한 발을 띄었는지 나누고 싶어 졌다.
생전 처음 들어가 본 터널에서 끝은 있는지 있다면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
지금 터널에 있는 사람,
터널을 막 나온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터널로 들어온 사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가 터널 안에 있었던 제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당신의 손을 잡을 거고, 이끌 겁니다. 한걸음, 한걸음, 그렇게 따라오시면 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