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설정 없이 눈이 떠지면 그때 일어난다. 희한하게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일찍 눈이 떠질 때도 있다. 새벽 5시 이기도 하고, 대부분은 7시 언저리로 일어나지만 절대로 억지로 일어나지 않는다. 눈을 떠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꾸물거린다. 역시 희한하게도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 눈을 뜨면 곧장 일어난다. 아마 언제든지 이불로 향할 수 있다는 충족감 때문인 것 같다. 회사 다닐 때는 항상 아침잠이 고프니까, 허한 마음이 늘 있었나 보다.
내가 자고 싶을 때까지 자다 보면, 밖이 밝아질 때와 비슷하게 일어나게 된다. 어느 날 8시 넘어서 일어난 날은, 내가 커튼을 치고 자서였다. 이제 사회적 시계보다 해시계를 더 따르는 몸이 되었구나 싶었다. 원래 인간의 본능은 농경사회에 속해있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다.
7시에 아침, 12시에 점심, 7시에 저녁. 이런 식사시간 따윈 이제 없다. 배가 고프면 그게 몇 시든 식사시간이다. 우리 집 부엌에는 브레이크 타임도 없고, 냉장고에 음식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만들면 되고. 요즘엔 시래기 된장국에 꽂혀서 하루 삼시세끼 그것만 먹는다. 이런 된장국에는 쌀밥보다는 보리나 현미가 섞여서 약간 된듯하게 고슬고슬한 밥이 어울린다. 시래기 된장국 전에는 또 한동안 리조또였다. 이런 걸 원푸드 다이어트라고 하는 건가? 살이 왜 안 빠지는 건지 진심 궁금하다.
졸릴 때 잔다.
점심 먹고 책을 펼쳤는데 식곤증이 몰려오면 애써 물리치지 않는다. 졸리면 자야지, 왜 저항 따위를 하는지? 가볍게 낮잠을 자고 밤늦게 깨어 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회사를 다닐 때면 새벽에 혼자 깨어 있으면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못했다. 가끔 밀린 회사일을 하던 것을 제외하면.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 컨디션을 조절할 필요도 없다. 특별히 잠이 부족한 날이 없으니, 매일 컨디션은 같다. 뭐 달라질 일이 있어야 조절을 할 텐데. 늘 잘 먹고 많이 자니 말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그게 과연 일인지, 얼마만큼 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회사를 다녔을 때도 하루 업무를 끝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하루 종일 되게 바빴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어.' 왜 바빴던 그때와 지금이 고민이 같을까? 글로는 같게 보일 수 있지만 결은 다르다.
회사를 다닐 때는 분명 많이 바빴고 근무 시간 내내 무언가를 하긴 했다. 하지만, 업무가 끝났을 때 밀려드는 공허함은, 가고자 하는 방향 없이 제자리만 뱅뱅 돌아다닌 후 몰려오는 피로감 같은 거였다. 메일을 확인하고 그저께 밀린 일을 하고 나면, 어제 밀린 일을 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그러기를 반복.
요즘의 일상은 일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느슨하고, 시간에 맞춰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니 책을 읽어도 정해진 분량이랄 게 없고, 글을 써도 당장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여 내가 즐겁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멀리서나마 희미하게 보인다는 차이가 있다.
회사를 다 때려치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도 27년을 병원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보람되고 즐거운 때도 많았다. 일 자체가 좋아서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재밌다'하면서 있기도 했고, 동료들과 맛집을 찾아다니던 점심시간도 즐거운 추억이다.
'회사냐 집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회사에 있으면서도 나를 충분히 돌보고 충전할 수 있었으면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다 하기에는 나는 방전 상태였고, 바닥까지 있는 힘을 다 써버린 상태여서 전원을 연결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1% 전원이 들어올 상황이었다.
나는 균형을 맞추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살면서 균형을 도저히 잡을 수 없게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그저 침몰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평생을 일과 나 자신에 대한 균형 잡기에 성공을 하면 좋겠지만, 폭풍우에 표류하는 배 위에서는 오로지 산산조각 나버린 나 자신만을 발견한다. 그럴 때에는 오로지 나를 다시 찾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백수가 된 이유이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어려운 인생문제를 풀어야 한다.
업무에 이상이 있으면 당장 알게 되고, 문제점을 발견해서 해결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대책을 세운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검진을 하고, 역시 진단명이 나오면 적절한 처방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지내면서 '어, 뭔가 잘못되었는데.'라는 문제는 명확하지가 않다.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도 막막하다. 진단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정체를 모르다 보니 불안하고, 불안보다는 무시하는 쪽을 택해서 마치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지낸다. 그래도 찝찝하면, 열심히 자기 계발 책을 사 본다. '아무래도 내가 시간관리를 잘못하는 것 같아.' '돈을 좀 더 잘 모으면 될 것 같아.' '대학원을 가볼까?'
만약 인생문제가 시간관리와 경제적 문제, 학업이었다면 해결이 될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질문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원인에 전혀 다른 해법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나를 온전히 돌아본 적이 없어서 문제가 생긴 건데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면, 삼각형 구멍에 동그라미 조각을 끼운 셈이다
그럴 때는 멈춰 서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중에는 자기 자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업무, 아이들, 삶의 걱정거리를 다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모른 채 걷고 있다면 일단은 그 자리에 멈춰야 한다. 지금까지 뛰어왔던 관성 때문에 멈추는 게 힘들 수 있다. 가슴은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데, 발이 여태 뛰던 대로 계속 뛴다면 결국은 넘어지고 쓰러질 것이다. 나도 결국은 그렇게 해서 넘어졌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일어나 그루터기에 앉아무릎과 팔꿈치에 까진 상처를 들여다본다. 이렇게 내 마음을, 나를 들여다본다. 어디가 얼마나 까졌는지, 많이 아픈지,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많이 아팠구나.' 내가 안쓰럽다.
'쓰라린 줄도 모르고 여태 뛰어왔구나.' 지금에서야 상처가 아프다.
'아무도 내가 다친 줄 몰라줘서 많이 서러웠구나.' 나를 이제야 안아준다.
그루터기에서는 앉을 수도 있지만 잘 살피지 않으면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으면 쓰러져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다.
몰랐다. 나를 위로하지 못하면 결국 쓰러진다는 걸.
남을 위로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나도 같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 괜찮은 줄 알았는 지금, 그게 아닌 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결국은 괜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 온전히 쉬기로 했다. 중병에는 급하게 센 약을 써야 하듯이, 내 상황에도 응급으로 격렬하게 쉬기로 했다.
이제 천천히 일어서 보려고 한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동안 걸어온 길에서 얻은 배움을 가지고 지금까지는 가려져서 눈에 띄지 않았던 작은 길로 가보려 한다.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봐야지', '가다가 힘들면 꼭 쉬어야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여러 다짐을 해보고 출발하지만, 몇 걸음 가다가 또 멈출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또 다짐.
이전과는 다르게 계획도 없고 따라서 시간표도 없지만 그래서 목적지까지 다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이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이 든다.
백수이지만 '아, 재밌다'라고 자축하는 하루. 잘 쉬면 그 날 할 일이 끝난 하루. 이런 오늘 덕분에 내일 나는 비로소 한 발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길 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멈춰야 할 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넘어질 때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쓰러지는 게 실패는 아니라고, 쓰러질 만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좀 쉬어도 된다고. 지나온 길과 나의 상처를 충분히 살펴보고 일어나서 이제 어디로 갈지 천천히 발을 떼어 보자고 이야기도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