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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08. 2020

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못하니까 못하는 거야.


살면서 쓰러진다.

젊었을 때는 '나는 절대 안 쓰러져'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런 걸 생각하고 살 여유가 없었다. 그저 살아가기 바빴고 해야 할 일들이 쉴 새 없이 몰려왔다.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매일매일 결정해야 할 일들이 쌓이고 나는 그런 걸 결정하는 게 삶이라고 생각했다. 잘 결정하면 좋은 삶인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닥으로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 있는 건 결정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결정해서 피하고 당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질병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의 상실일 수 있고, 그 종류는 다양하지만 살면서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수렁을 만나게 된다.


'시체같이 누워만 있었어.'

인생에서 먼저 쓰러져 본 아들 선배님의 말이다. 본인의 표현으로는 '시체'이고, 나는 '좀비'라고 말한다. 눈에서 삶을 살아내는 생기가 빠져나가고 그저 숨만 쉬는 아들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일과 집안일과 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인데 의자에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 큰 어른이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출근은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어서 엉엉 울었다. 주말에는 계속 잠만 잤다. 신기하게도 낮에도 계속 자도 밤에도 잠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자고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언가를 할 에너지는 하나도 없었다.


빨리 해결을 해야 한다.

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일어서야지.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다짐하면서 내 머릿속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상담을 신청했다.

다급한 마음에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신청하고 심리검사도 했다. 내가 지금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 줄줄 이야기하고, 빨리 상담사 선생님이 이걸 해결해 주리라 믿어 보았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시간이 걸려야 하고 과정이 있는 건데 지금 나가떨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에는 나는 내 아픔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운도 없었다. 결국은 네 번 받고는 포기했다. 상담도 내가 거기에 들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병원을 급하게 갔다.

아들이 다니던 병원을 바꾸면서 지금 원장님을 만났다. 아들을 면담하고 약물을 조정하고, 나와 따로 면담하면서 앞으로 아들을 어떻게 치료하겠다 말을 하고는, 나를 물어봐주었다. '엄마는 어떠세요?' 아들이 힘들면 나는 더 힘들고, 아들이 누워서 괴로워하면 나는 그 침대 옆에 앉아서 오열을 했었다. 엄마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원장님이 '엄마도 약을 좀 드시죠. 모성애 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으셔야 돼요.' 신경정신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그 말이 이상하게 나를 위로했다. '아,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구나. 지금까지는 나만 가족들을 케어했는데,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약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감정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막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나한테 힘들다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원장님 얼굴 표정이 심각해졌다. 약용량을 늘이고, 2주 후에 보기로 했다. 약을 꾸준히 먹으면 좋아질 거야. 이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체검사에서 비타민 D 수치가 6이 나왔다.

후배 한 명이, 자기도 나랑 증세가 똑같았는데 비타민 D 수치가 너무 낮아서 그런 거였다고 나에게 검사를 해 볼 것을 권유했다. 마침 정기검진 날짜여서 추가로 신청을 하고는 결과를 기다렸는데, 정상수치가 20부터인데, 나는 6이다. 그래도 6만큼이라도 있기는 한 거지만 거의 바닥이라는 말이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수치를 보여줬더니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면서 주사를 한 대 맞고 가라고 한다.

또 한 번 안심이 되었다. '아, 비타민 D 때문이었어. 이제 주사까지 맞았으니 다 원래대로 되겠지.'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응급으로 써 본 방법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마법처럼 당장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쓰러져 있었고 일어날 힘은커녕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힘을 내. 이런 거에 쓰러질 사람이 아니잖아. 일어날 수 있어.'

쓰러질 사람이 따로 있나? 사람이 도저히 예측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일들은 도처에 있다. 그걸 반드시 버텨내야만 하는 건지? 일어나라는 말 대신에 '쓰러질 만했다'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 모두 다 힘들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이런 말을 들으면, '아, 그렇지. 나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하면서 벌떡 일어나게 되지 않는다. 절대로.

오히려, '내가 바보지. 나는 이런 것도 견뎌내지 못하는구나. 나만 왜 이럴까?'이런 생각에 쓰러져 있는 곳에서 더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객관화시켜서 '너는 5점이고, 네 옆사람은 7점이니 너는 힘들다고 하지 마' 이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너무 잔인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주위 사람들은 위로를 건넨다.

질문이 든다. '꼭 지금 일어나야 하나?'

본인들이 불안해서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저러다가 계속 쓰러져 있으면 어쩌지?, 그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어쩌면 옆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불안을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가 일어나야 내가 안심이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왜 일어나지를 못해?'


'엄마, 시체처럼 1년을 있었을 때, 좋았던 게 뭔지 알아?'

내가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는 날, 아들이 마지막 퇴근길을 같이 해 주면서 버스 안에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말씀이니 일단 들어본다. '내가 그때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잠만 자고 그랬잖아. 근데 1년이 되어 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바로 그 날 일어났어. 그리고 엄마한테 나 음악 배우고 싶다고 말했잖아.' '나한테 그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엄마도 그런 시간을 가져.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아들이 엄마에게 시체처럼 지내라고 진지하게 권고하는데, 고개가 저절로 끄덕끄덕했다. 그 어떤 위로의 말, 일어나야 한다는 말보다 나에게 힘이 되었다. '그래, 그럴게. 한동안 누워있을게. 네가 엄마가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는구나' 상담도 약도 비타민 D도 주위 사람의 화이팅보다 아들의 그 말이 훨씬 나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지금 쓰러져 있다면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게 안된다면, 그냥 그곳에 더 쓰러져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주위 사람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억지로 일으켜 세워도 당신은 몇 발자국 못 가서 또 쓰러질 거다. 쓰러져 있어도 된다고. 그게 당연하다고. 잠시 더 쉬라고. 그러면서 당신 자신을 잘 살펴보라고.  그런 다음 당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주위의 누군가가 쓰러져 있다면

'왜 일어나지 못하냐?'라고 다그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못하니까 못하는 거다.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고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것 같다. 주위의 누군가가 쓰러져 있으면, 나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나를 둘러싼 모두가 다 희망에 차서 열심히 지내기만 해야 할 것 같나 보다. 그도 쓰러질 수 있고, 당신도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된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걸 본다면, 그가 애썼지만 일어나 지지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옆에 같이 말없이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가 어느 날 스스로 일어나게 될 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당신에게 고맙다고, 당신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노숙자 예수라는 벤치에 설치된 동상이다.  아무 말하지 않고 저 빈자리에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고 싶다. (사진출처: 동아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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