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 Nov 15. 2020

고2라는 상전

주중에는 부엌이 개점휴업이다.

집에 애들이 없으니 음식 하기도 귀찮고 해서 남편과 각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한다. 국 하나에 반찬 하나 놓고 몇 끼를 먹는다. 그러다 보니 식기세척기를 돌릴 일도 줄어들어 삼일째 채워만 넣고 있다.

둘째 날부터 없는 물건들이 생겼다. 점심때부터 국자가 없어서 계량컵으로 국을 펐다. 저녁에는 집게로 건더기를 푸고 냄비채 국물을 따랐다. 이쯤 되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고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셋째 날 점심에는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밥그릇 대신 국그릇을 쓰기로 했고 국자가 없는 건 냄비 안에 있는 국을 다 먹어버리는 걸로 해결했다. 그렇게 삼일치 설거지거리를 테트리스 쌓듯이 차곡차곡 넣어서 빈틈없이 식기세척기를 돌리니 그제야 뿌듯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늘어진 테이프처럼 지내다가 금요일부터 부산하다.

기숙사에서 오는 따님 맞을 채비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청소 안 한 거 보고 잔소리를 할 테고, 뭐라도 해서 먹여야 하니, 그동안 안 보았던 장도 봐야 한다. 월요일부터 놀고먹었던 걸 금요일 오전부터 바짝 보상해야 한다. 갑자기 내가 엄마와 언니들이 무도회에서 돌아오기 전에 집안일을 끝내야 하는 신데렐라가 된 느낌이다.

그래도 딸 얼굴 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막상 보면, '왔어?'소리 한마디 하고 딸은 입을 닫을 수도 있지만, 뭐 괜찮다. 그 귀한 목소리 들려주는 게 어디냐 싶은 게 사춘기 소녀를 둔 엄마의 자세다.


역시 상상은 종종 어긋나는 법이다.

만나자마자 달려와서 안길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얼굴에 얼음이 잔뜩이다.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좋아하는 짬뽕 먹으러 가자고 해도 반응이 없다. 게다가 금요일 오후답게 차까지 막힌다. 가뜩이나 차가운 차 속 공기에, 막히는 길까지 우리 둘 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운전하면서 별 생각이 다 든다. '친구랑 싸웠나?', '중간고사 망쳤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뭔 일이 생겼나?'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본다고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분위기도 아니어서 운전만 한다. 그나마 딸이 음악을 틀어 놓으니 차 안에 음악이라도 찬다. 덕분에 딸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좋은 음악이 있었는데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집에 와서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니 정황상 벌써 고2 2학기이고, 입시에 대한 압박이 본격적으로 오는 것 같다. 할 거는 많고, 공부는 하기 싫고, 그렇게 딴짓하다가 시간 보내다 보면, 공부 안 한 게 후회되고. 나도 익히 아는 그 사이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나라고 답이 있지 않다.

공부를 하라고 다그쳐야 하나? 그런다고 할까? 애가 저렇게 가라앉아 있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게 뭐가 될 수 있을까? 매번 생각하지만 답이 없다.

아마도 많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걸 견디기 힘들어서, '그래도 공부해',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결판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나도 불안하다. 나도 뭔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런가? 매번 불확실하고, 매번 흔들린다.


그냥 둬보려고 한다.

우리 둘 다 인생에서 불명확한 것을 그대로 두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도 아이가 흔들리는 지점에서 답을 주고 싶지만, 그게 안 될 때가 더 많다. 문제를 그대로 두면 불안하니까, 서둘러 그 문제를 없애려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다 한들, 미봉책으로 덮어버린 문제는 더 이상해진 형태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엄마나 딸이나 흔들려 보자. 그럴 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음식을 한껏 했는데도 밥도 안 먹는단다. 속이 상한다.

순두부찌개에, 동그랑 땡에 나름 부산하게 저녁상을 차렸는데도, 말도 안 하고 고갯짓만 도리도리 한다. 나는 뭔 죄인가? 영문도 모르는 채, 어느 장단을 맞춰야 할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큰소리 안 내려고 하는 엄마이다. 때로는 이게 맞는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성격이 이러니 이렇게 지내는 게 편하다. 이러다가 딸이 갑자기 말을 상냥하게 건네주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갔구나'생각한다.

그래, 그렇게 오락가락해라. 엄마는 이렇게 늘 있을 테니, 네가 오락가락하다가 한번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오늘 기숙사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넌지시 말은 건네봐야겠다. '속상한 일 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하라고. 네가 속상하니까, 엄마도 속상하다'고.  다음 주에는 시간 내서 같이 보러 가기로 했던 전시회나 가볼까 한다. 하루정도 공부는 말끔히 접어두고, 실컷 돌아다니면 기분도 좋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춰주려고 애를 쓰니 딸이 상전이긴 하다. 고2라는 상전. 대학만 들어가봐라. 국물도 없다. 딸아.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청춘을 쫓아가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