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 Nov 07. 2020

딸의 청춘을 쫓아가 보다

주중에 딸과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딸이 기숙사에 있기 때문에  집에 참고서를 주문해 놓으라던가, 금요일 몇 시쯤 자기를 데리러 오라던가 하는 일 외에는 문자도 주고받을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교실과 기숙사에만 있을 딸에게 전화라도 오면 무슨 일이 났나 화들짝 놀라게 된다.


딸의 알리바이를 놀라지 않고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딸이 사용한 체크카드 사용내역을 받을 때이다.

12시 39분 2500원 학교매점이다. 점심 먹고 친구들끼리 뭘 사 먹나 보다. 친구들하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로 깔깔거리고 있을 소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만 재미있고, 그래서 그때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풀어놓아야 십 대의 태스크를 다 하는 모양이다. 그 나이에 해야 할 일이 공부보다, 입시보다, 친구들끼리의 수다량을 채우는 게 소녀들에게 더 어울려 보인다.

가끔 친구와 전화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뭐 먹었는지 물어보고, 맛있었는지 물어보고, 나는 뭘 먹을지 말하고, 산다는 화장품은 샀는지, 대략 이런 토픽들이 오고 간다.  오늘 저녁에 기숙사에 돌아가서 보면되고, 그때 만나면 저절로 다 알게 될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서로 이야기하고. 나는 왜 웃는지 모를 포인트에서 서로들 웃겨 죽는다. 케이크 먹었다는 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내가 너를 쳐다보면, '엄마는 몰라'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지만, 네가 이상해서 바라보는 게 아니야. 눈이 부셔서 그래. 그렇게 환하고 빛나는 청춘의 한 자락을 너는 당연한 듯 생각하지만, 엄마가 보기에는 맘껏 누리고 있는 네가 부럽다. 그래서, 너만 보면 웃는 거야. 나도 좋아서.


 딸에게 빌려줬던 잠바를 입었는데 주머니에 종이조각이 있다.

친구하고 영화 보러 간다더니 영화표였다. 뭐 보러 갈까 고민하길래 '요즘 이게 재미있대.' 하고 말했더니 그 영화를 본 모양이다. 이제는 친구하고 영화를 보러 다니니, 딸하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내게는 점점 희박해 보인다. 겨울왕국을 같이 봤었는데, 그게 딸과 같이 본 첫 영화는 아니었다. 첫 영화에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소중한 기억인데 전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아쉽다. 딸과 경험을 같이 하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한 건데. 내게는 앞으로 기회가 적게 남은 듯하고,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은 희미하니, 나는 그저 아쉽기만 하다.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딸은 친구와 봐버려서 나는 영화 메이트를 잃어버렸다. 재미있다는데 혼자 봐야 하나?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하지 않을까? 왠지 처량하다.

'작은 아씨들'에 대한 기억이 나서 그나마 다행이다. 소설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몇 년 전에 '작은 아씨들'을 읽어보라고 했고, 서로 어떤 캐릭터가 좋은지 이야기했다. 나는 조가 좋다고 하고, 딸은 에이미가 좋다고 하고.

내게 개인적으로 '작은 아씨들'은 좀 희한하다. 이유를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는데,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유독 한 장면이 그 책만 생각하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 기억에는 메기가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들은 조가 푸념하는 대목이다. '왜 아기 고양이는 어른 고양이가 되는지, 머리에 다리미를 올려놓아 안 컸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데 메기가 나타나서 웬 고양이고, 다리미냐고 묻는 장면이다. 내 기억이 맞는지 책과 대조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초등학교였을 것 같은데,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때의 다른 기억은 희미한데 책의 이 부분만 생생하다. 이유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을 것 같고, 나는 내내 궁금해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대목이 오늘 이 글에 어울리는 이유는 알 것 같다.

'왜 아기 고양이는 어른이 되고, 너는 이렇게 많이 커 버렸을까. 네 머리에 다리미를 올려놓고 싶어.'


그녀 영화 끝나고 아이스크림을 먹다.

속속 드러나는 그녀의 알리바이. 영화관이 있는 백화점 위층에 있는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껍질을 고이 접어 옷 주머니에 넣어 놓은 모양이다.

딸과 나는 입맛이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나는 단 음식을 싫어하는데, 딸은 달달한 주전부리가 늘 있어야 한다. 소녀들은 모두 떡볶이에 환장하는지 집에 있을 때마다 매운 떡볶이를 시켜 먹고 싶어 한다. 나도 웬만히는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자부하는데도, 매주 그것도 내게는 많이 매운 떡볶이를 먹어야 하니 다음날 계속 화장실행이다. 그래도 그렇게 딸과 마주 앉아 서로 '아, 매워. 매워'하며 쿨피스를 먹고 싶어서 그냥 먹는다. 나중에 이 장면도 그리울 것 같아서..


딸은 음식에 대해서 까다로운 편이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데, 하나를 먹더라도 음식이 가장 맛있는 온도가 다르고, 같이 먹어야 할 음식이 갖춰져야 하고, 단짠과 기름지고 담백한 조합도 어울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성에 차지 않을 때는 직접 요리를 한다. 꽤 잘하는 편이다. 떡볶이는 내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으뜸이고, 찜닭도 잘해서 그게 먹고 싶을 때는 딸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 찜닭을 만들 때도 사리를 우동이냐 당면이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떡은 꼭 들어가야 하고, 적당하게 매워야 하므로, 아주 진지하다.

딸이 요리를 할 때는 나도 바쁘다. 요리사께서 요리는 하지만 요리만 하시기 때문이다. 양념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줘야 하고, 양념을 다 쓰면 뚜껑 닫아서 제 자리에 넣어 놓아야 하고, 다 쓴 도마는 설거지통으로 정리해야 하고. 내가 할 때 보다 더 바쁘다. 이렇게 도와주는데도, 자기가 쓸려고 놓아두었던 주걱을 내가 설거지통으로 넣어 놓았다고 한 소리 듣는다. 참 내, 맛있으니까 참는다. 정말.


무심코 쫓아가 본 딸은 깔깔거리고, 속닥거리고, 달달하다.

내 십 대를 생각하면 단편적인 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느 장면은 나도 모르게 우울했던 때이고, 고등학교 운동장 벤치가 생각나고, 친구와 별 것도 아닌 일로 대판 싸웠던 일도 떠오르고, 이문세의 노래가 생각난다.  지워졌는지, 내 십 대에는 깔깔거리고 속닥거리고 달달한 기억이 없다.  나라고 그런 순간이 없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장면에는 기본적으로 아련한데 뭔가 쓸쓸한 마음이 깔려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인지.

그래서, 나는 딸의 십 대가 좋은가보다. 생생해서. 그녀의 청춘이 총 천연색으로 내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나의 흑백 사진들이 그 위로 겹쳐 보여서.


하지만, 누군가 내게 청춘을 다시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싫다고 말하겠다.

충분히 아름답고 눈이 부시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찬란한 순간만 있지는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찬란한 만큼 어두운 때도 있었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든 순간들도 있었다. 그걸 모두 다시 겪어야 오늘의 내가 되는 걸 아는 지금,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사절이다.  

대신에 딸의 청춘을 직관하겠다. 지금 찬란한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해 주겠다. 힘든 시간에는 옆에 묵묵히 서 있어 주겠다. 본인은 지금을 군데군데 잊어버리더라도, 딸이 얼마나 빛났었는지 내가 두고두고 이야기해주겠다. 그게 딸과 나의 지금을 동시에 기념해 주는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녀의 머리에 다리미를 올려놓아도, 그녀는 커서 어른이 되겠지.

그녀의 젊음이 눈이 부시기도 하지만, 앞으로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마음이 아리다. 그때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나이가 들고 보니 좋았던 일, 나빴던 일이 모두 공평하게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좋았던 일도 아련해지고, 나빴던 일도 희미해지고. 그래서 덜 찬란하지만, 동시에 담담해지나봐.  모든 일은 다 지나가고 조금씩 잊혀지겠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네가 가장 눈부셨던 순간은 계속 선명할 것 같아.




매거진의 이전글 라디오 주파수 같은 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