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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Dec 08. 2020

엄마는 그러라고 있는 거야

기말고사가 바로 코앞인데, 딸이 기분이 좋다.

이건 좀 이상하다. 기분 좋을 타이밍이 아닌데 말이다. 시험공부를 많이 해 놓아서인지, 아예 포기를 한 건지, 가닥이 잡히지가 않는다. 이건 기분이 좋아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이니, 내년 수능까지 1년 남은 기간 동안 나도 롤러코스터에 동승하게 되었다. 당사자인 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잘 버텨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이유는 몰라도 기분이 좋은 딸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애교를 부리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그 순간순간이 좋았다. 언제 또 딸이 변덕을 부려 얼음장 같아질지 모르니, 마음껏 즐겨보자 그런 마음이다.


자기 방에 있다가 심심하면 괜히 내 방에 들어온다.

들어와서는 괜한 트집을 잡는다. 왜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느냐, 누워서 뭐 보냐, 밥은 뭐 해줄 거냐. 먹을 게 하나도 없다. 당장 임금님 수라상을 대령해라.

길에 다닐 때는 손도 못 잡게 하더니, 슬며시 품에 파고들어서는 내 팔을 베고 누웠다. 강아지까지 합세해서 내 가슴 위로 올라오니, 좁은 이부자리 위에 셋이 바글바글하다. 서로 네가 비켜라, 나도 좁다 실랑이를 했지만 이 또한 즐거운 순간이다. 강아지는 내 얼굴을 핥아대고 한 손은 딸에게 내주었으니 나는 속수무책으로 소리만 지르고 소란스러운 주말 오후였다.

그렇게 하렴. 아무 때나 그렇게 불쑥불쑥 들어오고 들어오면 벌렁 누워버리고 말도 안 되는 어거지 부리고. 그게 지금 네가 엄마한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효도란다.


내가 해 준 밥을 조용히 리필해서 두 번 먹는다.

딸이 밥을 먹을 때면 한식대첩에서 심사를 받는 사람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워낙 맛에 대한 평가가 까다로운데다가 대부분 맞는 소리이기 때문에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반응이 늘 궁금하다. 베이컨 계란 볶음밥을 한 그릇 다 먹고는 한 번 더 먹고, 어묵 국도 두 그릇째이다. 주말에만 집에 있는 딸에게 있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주고 싶지만, 나도 주말이면 눕고 싶고, 맛있는 음식이 뚝딱하고 나오는 게 아니니, 늘 메뉴 고민, 맛 고민이 많다. 이번처럼 반응이 좋을 때면, 무사히 한 끼가 지나갔구나 안도와 동시에, 숟가락 놓기도 전부터 다음끼가 고민이 된다. 나도 급식판만 갖다 대면 누가 영양소 다 고려해서 만든 남이 해 준 밥 먹고 싶다. 정말로.


시험공부가 안된다고 국어 책을 들고 와서는 나한테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아직도 저렇게 시를 낱낱이 분해해서, 이 구절은 무슨 뜻이고 외우게 가르치나. 시를 저렇게 배워야 하나 생각은 들었지만, 당장 며칠 앞의 기말고사를 두고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를 논할 여유는 없다. 딸이 하나라도 더 공부하게 나는 충실하게 학생 노릇을 해야 한다. 굳이 많은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딸이 하는 말을 하나도 모르겠어서, 진심으로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고2 국어에 무지한 엄마를 둔 덕분에, 딸은 열심히 교과서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었고, 나는 오래간만에 딸의 공부에 일조한 엄마 역할을 하였다. 뭐지, 잘한 것 같으면서도 진 것 같은 이 기분은.


주말 동안 엄마를 알뜰하게 써먹고는 딸은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쓰임새가 많아진 주말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엄마는 그러라고 있는 거야. 기분이 좋을 때도 찾고, 나쁠 때도 찾고.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네가 찾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는 거야.

엄마는 그러라고 있는 거야. 엄마보다 훌쩍 큰 키로 그래도 어린양 하고 싶을 때, 괜히 와서 살쪘다고 시비 걸고 싶을 때 말이야. 나는 웃긴 이야기 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박장대소하고, 그러면 너도 피식 웃고, 나는 또 그 모습이 예뻐서 웃고.

엄마는 그러라고 있는 거야. 혼자서 방에서 음악 실컷 듣다가도 이 엄마가 왜 조용하지, 뭐하나 궁금해서 아무 말하지 않고 방에 와서 같이 누울 때, 네 밝은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엄마의 옆에 있을 때. 엄마가 너무 행복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엄마를 많이 사용해줘. 엄마는 네가 이제 엄마가 덜 필요한가 슬플 때가 있거든. 이렇게 저렇게 엄마를 자주 찾아주고 엄마를 집적거려 줘. 그럼, 엄마도 누워서 유튜브에 나오는 방탄 영상만 보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네가 맛있게 먹었던 마라탕도 하고, 미역국도 끓이고 그럴게. 다음 주에도 엄마 방에 쥐방울 드나들듯이 그렇게 와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안 컸으면 좋겠다. 네가 보라색 드레스 입고 다니던 꼬마 때부터의 바람이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고 너는 이렇게 쑥쑥 컸고, 앞으로도 안 이루어질 줄 알지만, 계속 바라본다.

지금 네가 제일 눈부시게 예뻐서. 그렇게 엄마를 찾아 주는 게 눈물 나게 행복해서 말이야.


기말고사가 끝나고 과연 금요일 딸의 기분은 어떨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주일만에 기분이 돌변해서 집안 공기를 아슬아슬하게 만든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

그래도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할 딸에게 수고했다 토닥거리고 무엇을 먹일까, 오늘부터 이른 식단계획에 착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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