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열흘차 그만둘까 생각했다

by 소피아
한 회사를 21년 다녔으니, 끈기가 없는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입사한 지 열흘째에 그만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원인은 회사 오리엔테이션에서 왔다. 회사 소개, 제품 소개까지는 흥미로웠다. 무얼 더 배워야 할지, 어떻게 하면 시장을 좀 더 살릴 수 있을지 메모도 열심히 해가며 궁리하고 있었다. 발단은 오후에 있었던 회사 엄청 높으신 임원분의 회사 인재상과 비전에 대한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파워포인트 한 장에도 저마다 다른 글씨체와 크기가 섞여 있는 건 그래도 참을만했다. 직원은 8시간 일하면 되고 임원은 16시간 일하고, 자는 시간만 빼고 20시간 일해야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어느 일본 회사 사장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처음으로 '흐음'했다. 직원은 8시간 일하고 쉬는 게 아니라, 임원이 일하는 추가 8시간만큼을 공부로 채워야 한다고 젊은 신입직원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잘 안된다고 하신다. 그러지 마시지.

회사 오리엔테이션이 그 회사에 대한 본격적인 인상을 주는 시간인데, 이 교육에서 받은 분위기가 회사 전체를 좌우하는 거라면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하이라이트는 여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클라이맥스는 교육이 다 끝나고 마지막 두 장 슬라이드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시 두 개를 낭송하고 끝이 난 부분이었다. 아, 정말 내 코드는 아니로구나, 이건 교육이라기 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 하고, 마지막엔 문학의 밤으로 끝나는 내가 보기에는 이상한 시간이었다.


이어지는 그다음으로 높은 것 같은 임원분이 하는 교육.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나, 또 이어지는 훈화 말씀. 요즘 젊은 직원들은 근무시간 끝나고 또는 주말에 회사일로 전화하면 받지를 않는다고. 신입사원들 교육 때 전화 좀 받으라고 당부하신다고. 그러지 마시지. 나의 촉으로는 젊은 직원들이 와서 얼마 안 있고 그만두곤 했다는데, 이 분 영향도 일부는 있을 듯하다. 급한 일이면 전화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근무 시간 외에 회사 직원에게 오는 전화를 꼭 받아야 할 의무는 없는데, 마치 당연한 일을 안 하고 있는 양 말씀하시는 게 영 불편했다.


둘째 날은 공장 실습을 나갔다.

첫째 날, 머리에 남지도 않는 명언들로 하루를 너무 길게 보내서, 차라리 현장이 낫겠다 싶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용은 흥미로웠지만 하루 종일 서서 돌아다니려니 허리, 엉치 할 것 없이 삐끄덕 거려서, 현장에서 비는 의자만 보면 염치 불구하고 앉기부터 했다.

정밀하게 조립해야 하는 부품이 많아 사람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이었고, 실습으로 군데군데 따라는 해 보았지만 내가 만든 제품은 100% 불량일 뿐만 아니라 속도도 너무 느려서 하루에 몇 개나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숙련된 분들이 리드미컬하게 자신이 맡은 부분을 착착 하는 걸 보니, 저건 내 재주가 아니다 싶은 동시에 그분들이 대단해 보였다.

첫날의 따분했던 교육보다는, 둘째 날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 분들의 예술 같은 손놀림을 보면서 오히려 회사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저렇게 애써서 만들어지는 제품을 내가 좀 더 잘 팔아야겠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럴싸한 말로 들어찬 교육보다 현장의 소음과 부지런한 몸놀림이 나를 더 감동시켰다.

어쩌면, 고도로 계획된 오리엔테이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날 일부러 기대치를 떨어뜨렸다가 둘째 날 상승시키는. 흐음. 그렇다면 정말로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하면서 그 정밀하게 의도된 오리엔테이션에 동참해 보리라 의욕도 생기는 바였다.


내가 다녔던 회사 분위기가 평균적인 게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회사가 미국 회사였는데, 내 상사 중에는 훌륭한 여성분들이 많았고, 그들 밑에서 나도 여성 리더가 어째야 하는지를 트레이닝 받았었다. 회사 내 분위기도 수직적인 구조보다는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원활했어서, 새로 입사한 회사 분위기에 더욱더 어색해하고 있는 것 같다.

회사가 수직적인 구조일수록, 숫적으로 또는 높은 지위에서 밀리는 여성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 아마도 내가 삼십 년 이 회사 역사에서 첫 여성 임원인 것 같다. 내가 경험했던 다른 회사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드문 일이다. 그만큼 내게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많이 있을 거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누가 내게 여성 임원으로서 무얼 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사장님은 단지 마케팅에서 본인이 원하는 하는 바를 내게 말했고, 나는 그 일을 하면 된다. 내 일에는 성별이 따라붙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와 다르게 오늘 이 회사에 머물러 있어 보겠다고 결심하면서 내 성별이 다시 회사와 상관이 있어졌다. 업무에는 성별이 없지만, 나는 여성의 정체성을 장착하고 일하리라 생각했다.


회사 내에서 여자 이사가 무척 평범한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해 보기로 생각했다. 여자 임원들이 반도 넘었던 이전 회사에서라면, 나까지 굳이 여자 직원들을 위해서 발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많은 다른 여자 임원들이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끄덕끄덕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세상 소심하고 비겁한 내게 유일한 여자 임원이라는 자리가 놓였고, 나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 죽어라 하기 싫어하지만, 내 목소리를, 여성의 목소리를 내 보리라 생각해본다.

내게 여자 직원들은 아무 기대가 없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오기로 무엇 하나 작은 것이라도 여성 직원에게 달라지는 회사가 되었으면 하는, 그 일을 내가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의무감이 생겼다.


높은 임원님이 들려주었던 시구절이 머릿속에 남아 찾아보았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였다.

그래도 교육 시간이 영 의미 없지는 않았나 보다. 무엇 하나라도 기억에 남았으니 말이다.


(생략)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혹시 아나, 내가 그 담쟁이 잎 하나가 될지?

넘을 수 있는 벽일지는, 일단 담쟁이가 되어 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 임원분이 이렇게 말했다. '결국은 담쟁이 하나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거라고'

그 말 하나에는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결국 이렇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생기기 않을까, 일부러 섣부른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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