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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에서 말을 잃은 우리 아이를 위해

스웨덴 학교 장애이해 교육

by 엘 레나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보내준 주간 계획표를 보니, 뮤지컬을 보러 간다고 되어 있었다. 뮤지컬 내용은 발달장애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다. 남편과 이 얘기를 하며, “어떡하냐, 쟤 재미없다고 또 난리 나겠는데”라는 걱정이 앞섰다.

우리 아이는 스웨덴어를 거의 할 줄 모른다. 아이의 스웨덴어 수준은 숫자를 50까지 세고, 야채 이름을 알고, 좋아요/싫어요 정도를 표현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한국어로 들려줘도 아이가 이해 못 할 것 같은 내용을 스웨덴어로 보여준다면 또 “학교는 재미없어! 가기 싫어!”라며 난동을 피울까 걱정이 앞섰다.


야심 차게 장애에 대한 선행학습을 해볼까 하였으나, 이내 나도 장애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하고는 포기했다.

엄마는 장애이해 교육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어.


돌이켜보면 나는 장애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내 또래 그리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는 학교에서 장애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장애에 대한 나의 이해는 KBS에서 하던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졌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해서 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돈이 없고, 낡은 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 장애가 없는 정상인들이 배려해주고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뮤지컬 관람의 날이 되었다. 우리는 솔직히 아이가 공연을 즐기거나 거기서 뭘 배워오는 걸 기대하기보다는 살다 보면 매일매일 재미있는 일만 있을 수는 없다, 때로는 재미없고 하기 싫은 걸 하는 날도 있다는 걸 일깨워주자고 마음먹었다.


재미없는 일을 잘 참아보라는 인생의 심오한 교훈을 어떻게 덜 상처 받게 얘기할까 고민하며 나는 하굣길에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오늘 하루를 물어보았다. 웬일인지 아이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너무 재미있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아, 얘는 뮤지컬을 보러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가는 과정이 소풍 같아서 재미있었나 보다. 다행이다 그래도’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나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콧노래로 막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달라며 스웨덴어로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도 스웨덴어를 못하는 처지라, 아이가 불러주는 대로 더듬더듬 검색을 했는데 그날 보고 온 뮤지컬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이 때는 아이가 스웨덴어를 완전한 문장으로 하지 못하고 아는 단어 몇 개를 붙여 더듬더듬 의미만 전달하던 때였는데, 이 정체불명의 뮤직비디오를 몇 번 보더니 어느 순간 긴 문장으로 된 스웨덴 노래를 줄줄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랩까지!!


장애이해 교육이 그렇게 재미있는 건가?

아이가 보고 온 건 Hej, Hyper(안녕, 히퍼)라는 제목의 뮤지컬이었다. 이 뮤지컬은 스웨덴의 뇌과학연구재단에서 아동 신경정신과 질환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프로젝트는 특히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자폐증, 뚜렛증후군, 언어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웨덴도 많은 아이들이 위와 같은 신경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증상이 완전히 호전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연구재단에서는 F클래스(한국으로 치면, 예비 1학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의 어린 학생들에게 신경정신과적 질환을 이해하고 서로 배려할 수 있도록 음악, 연극, 세미나, 미술활동 등의 방식으로 교육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다른 얘기이지만, 한국의 많은 클리닉들은 아동들의 신경정신과적 질환이 대개 학업 스트레스에 기인하고 있다고 하며 과도한 교육열을 불태우는 엄마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런데 학업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스웨덴에도 같은 질환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니 정말 기이한 일이다.)


프로젝트의 이름이 왜 ‘HYPER’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과잉행동(hyperactive), 과도하게 예민하거나(hyper-sensitive), 과도하게 성급하거나(hyper-fast), 과도하게 집중하거나(hyper-focus),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면이 있어요.

누구나 조금씩은 과하거나 예민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런 질환도 아주 특별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는 메시지이다.

111.png Hej Hyper의 웹페이지. 알록달록한 색감과 그림이 눈길을 끈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활용할 수 있는 교육자료들이 제공된다. (출처 https://hejhyper.se/)


Hej, Hyper 웹사이트에 가보면 뮤지컬뿐만 아니라 집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미디어 자료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장애이해 교육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자료를 활용해 가정과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특히 가라오케 애니메이션으로 뮤지컬의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르는 걸 아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världens bästa klass(세계 최고의 교실)“의 가사는 이런 내용이다.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권리가 있어.
넌 너 그대로도 괜찮아.
어떤 사람은 앉아있고, 어떤 사람은 서있을 수도 있지.
누군가는 춤을 추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축구를 좋아하지.
222.png Hej Hyper 가라오케. 교실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저글링 하는 아이들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휠체어에 앉은 친구도 있다. (출처 https://hejhyper.se/)


우리 아이들이 이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른다고 해서 이 내용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이들은 조금 다르더라도, 느리더라도 괜찮은 거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넌 너 그대로도 괜찮아.

내가 낯선 나라에 와서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학교를 다니는 아이의 엄마로서 스웨덴의 장애교육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 것은 비장애인인 우리 아이가 언어문제를 극복하고 장애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아주 체계적으로 잘 배우게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 조금 다르더라도 충분히 괜찮다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게 해 주고, 이방인으로서 친구들 주변을 맴도는 우리 아이를 위로해줘서 좋았다.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만큼 스웨덴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는 그동안 답답해하고 본인 스스로 '내가 말을 못 해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즐겁지 않다'라고 걱정했었다. 늘어가는 아이의 짜증에 가족 모두가 힘든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말을 잘하거나 조금 못하는 건 중요하지 않고, 자기가 배워가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웨덴인 친구들이라도 어떤 아이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 어떤 아이는 말이 별로 없는 것처럼 자기도 그냥 자기 속도에 맞게 말하고 배워가고 있는 거라고.


한국에서는 말도 잘하고 뭐든지 빨랐던 우리 아이는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졸지에 말이 느린 아이가 되었다. 감히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는 부모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 아이를 통해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이런 것이다.

장애이해 교육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한 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 장애인들도 자신의 장애를 이해하고 긍정함으로써 비장애인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당당히 자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


한국에서도 요즘은 학교마다 장애이해 주간을 정해서 교육도 하고, 독서감상문 쓰기,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출연한 장애이해 드라마 시청 등 서로 이해하는 사회를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아이들도 장애교육으로 장애에 대한 지식만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Hej, Hyper 웹사이트 http://hejhyper.se/

* Hej, Hyper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hejh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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