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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여행을 가르치는 법

프롤로그

by 엘 레나

아이를 키우며 나는 종종 '이런 것까지 말로 설명하고 가르쳐줘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한다. 접시에 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흘리지 않게 접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숟가락질을 해야 한다는 식사 요령부터, 친구와 공놀이를 하다가 부딪혀서 친구가 넘어졌을 때엔 공을 좇아가기보다 친구에게 '괜찮아?'라고 물어보며 손을 내밀어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령까지. 10살이 넘어 몸은 훌쩍 커지고 힘도 세진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수십 번을 반복할 때면, '얘가 커서 사람 구실은 하고 살까?',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잔소리를 하며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 믿는다.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이렇게 가르쳐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면 '나는 어렸을 때 이런 걸 부모님께 배운 기억이 없는데 우리 아이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은 입술이 부르트도록 여러 번 가르쳐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도 그 노고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는 처음부터 당연히 그런 걸 할 줄 알았던 사람이고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미숙한 존재로 여기며 죄 없는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멘토 오은영 선생님이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한 아이를 우리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이 길고 긴 양육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자라서 혼자 일어설 수 있도록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 중 하나라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여행하는 법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는 이유?
휴일에 집에서 뒹굴며 유튜브 보는 꼴이 보기 싫어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주기 위해, 또 가족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간다. 특히 주말 동안 SNS 피드에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주변 가족들의 행복한 나들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주말 나들이도 경쟁의 한 축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나 또한 그런 경쟁에 밀리지 않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주말과 휴일마다 박물관으로 체험학습장으로, 유명하다는 관광지로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다니는 부모 중 하나이다.


아주 솔직히 얘기하자면,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 중에는 체험형 교육이라는 긍정적인 목표 외에 '휴일에 집에서 뒹굴며 유튜브나 보고 게임이나 하는 아이들의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 부정적인 현실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래서 주말에 어떤 이유로 나들이를 하지 못했을 때에는 나의 게으름, 부지런하지 못함, 아이들을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괴로움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아이들을 주말마다 데리고 나가 여행을 시켜주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주중에 일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주말 이른 아침부터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을 때, 여행의 모든 순간순간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계획과는 어긋나서 누군가는 짜증이 날 수도 있고, 목적지의 모습이 인터넷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너무 볼품없어 실망스러울 수도 있고, 몰려드는 인파에 긴긴 기다림을 거쳐 간신히 SNS에 올릴 인증샷만 몇 장 건지고 지쳐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잔뜩 지치고 예민해진 가족들이 차에서 큰 소리 내며 싸우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좀 큰 아이들은 차 안에서나 여행지에서나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이라도 교통 체증과 붐비는 유명식당의 대기를 버티기 위해 영상 시청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렸다면 집에서 하릴없이 뒹구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주말에 뭐라도 해보자고 떠나게 된 이 여행에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일까? 그냥 게임하고 영상을 시청하는 장소가 익숙한 '우리집'이 아니라 다른 장소인 걸 우린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들에게 여행이란? 새로운 곳에서 처음 연결하는 와이파이로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것.

이렇게 되면 나는 결국 주말에 가족과 유익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주된 목표, 영상 시청으로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겠다는 부수적인 목표 달성에 모두 실패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내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돈은 돈대로 써버린 채 말이다.


여행으로 가르치지 말고, 여행을 가르치자


그래서 나는 우리 여행의 목표를 바꿔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달성하지 못할 목표라면 깔끔하게 포기하거나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이전의 나는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내가 정한 목적지로 아이들을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무슨 활동을 하고, 어떤 것을 배우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곳의 유명하다는 식당, 체험활동은 꼭 하고 인증샷을 남겨야 하기에 예약이 안된다면 그곳에 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가는 걸 포기한 적도 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옵션이 별로 없는 패키지 여행이랄까.

그리고 내심 아이들에게 이런 기대 또는 요구들을 했었다.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이런 곳에도 데려오고.. 고맙지? 재미있지?

여기 교과서에도 나오는 중요한 곳이야. 이 박물관에 있는 이건 꼭 보고, 설명도 다 읽고 가야 돼. 대충대충 보지 말고!

여기서는 이렇게 사진 한 번만 찍자. 자, 웃어!!

차표부터 숙소 예약, 입장권 구매까지 엄마가 다 해놨고 너넨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줘?


하지만 방향을 바꿔서 이 글의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부모로서 여행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면?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악기를 가르치고 친구들을 사귀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여행을 가르칠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여행에 관한 한 조금 다른 요구들을 해야 할 것이다.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야? 거기까지 가려면 뭘 타고 가야 할까?

그곳에 가려면 어떤 걸 준비해 가야 할까?

여행을 가서 네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어떤 거야?




세상에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겨라'라는 의미의 격언이 많다. 여행도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지에서 무얼 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곳까지의 여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걸 조금 더 즐겨 보는 게 어떨까? 아이들이 여행지에서 보게 될 것, 하게 될 것보다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의 준비 과정과 낯선 곳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에 방점을 두고 떠난다면 사전에 촘촘하게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관광명소에서 사진을 남기지 못해도 이제 우리의 여행은 실패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엄마 아빠 없이 훌쩍 떠나버릴 너희들을 위해. 일단 출발!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여행을 가르치는 걸 시작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아이가 우리의 품을 떠나 혼자서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여행전문가도, 교육자도 아닌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 분명히 앞으로 많은 실수를 하게 될 테지만 그런 실수를 실패로 여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예전의 우리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순 없겠지만, 아이들도 나도 여행의 과정을 배워가며 조금 더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되뇌면서. 조금씩이라도 바꿔 가는 데 의의를 두면서.


- 프롤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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