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 여행기(3)
2월의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선 슈투트가르트의 미술관은 조용했다. 아직은 코로나로 공공시설 이용에 제한이 있던 때라 평일 오후의 미술관에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만 드문드문 천천히 전시실을 둘러보고 계셨다. 고상하게 미술 작품 감상을 하고 있는 흰머리의 멋진 독일인들 사이에 무거운 배낭을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버린 어린이 두 명을 끌고 들어온 검은 머리의 동양인 여자에게 별안간 부담감이 훅 덮쳐왔다.
갑자기 들어오게 된 미술관이라 컬렉션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기에 우리는 전시실 하나하나를 세심히 훑어보아야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럽의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소장 작품이 많기 때문에 모든 전시품들을 다 둘러보는 게 아니라 그곳을 대표하는 작품들만 콕 집어서 둘러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OO에서 꼭 봐야 할 그림 5선' 이런 식으로 - 프랑스 루브르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이탈리아 우피치 하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영국 대영 박물관 하면 로제타스톤 - 마치 시험에 나오는 부분만 집어 주는 족집게 강의를 보듯이 미술관을 보게 되는데, 이 날은 우리 스스로 이 미술관을 탐험하게 되었다.
9살(한국식 나이로 11살) 아들은 미술관에 온 것 자체도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닌 것인 데다가 엄마가 끌고 다니며 중요 작품들에 대한 설명만 쏙쏙 떠먹여 주는 것도 아니라 돌아다니며 스스로 그림을 둘러보라고 하니 불만이 폭발했다. 심지어 뛰어다니거나 큰 소리 내는 것도 안 된다고 하니, 한창 에너지 넘치는 9살 남자아이에게는 감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처음에 아들은 뭔가 열심히 보려고 시도는 했으나, 어떤 작품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섰다가 미술관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제지하는 바람에 의기소침해져서 그 이후로 작품 감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술관에는 무료 와이파이가 있어서 이 이후로 아들은 전시실 내 소파에 앉아 열심히 게임을 했다. 이런 미술관에 오는 게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에 한 번도 없을 기회이건만 거기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내 속이 부글부글 끓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을 보며 화가 나는 것처럼 아들도 본인 뜻대로 되지 않는 여행의 이 상황이 화가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지르며 떼쓰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엄마와 동생이 그림을 보는 동안 조용히 앉아서 스크린만 보고 있는 아들에 그냥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림을 공부 거리로 보는 엄마와 마음으로 느끼는 아이들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Staatsgalerie Stuttgart)에서 재미를 느낀 사람은 의외로 7살(한국식 나이로 9살) 딸이었다.
나는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미가 있는 그림들을 좋아한다. 사람의 살결과 실크 드레스의 광택을 붓으로 캔버스에 그려 넣은 화가의 테크닉과 단단한 돌을 깎아 몸의 선을 따라 흐르는 얇은 천을 표현한 조각가의 섬세함을 보며 감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의 눈에도 카메라와 3D 프린터가 없던 시대에 사람의 손으로 그런 미술품들을 만들어 낸다는 게 얼마나 놀라울까?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7살 딸은 (심지어 그림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9살 아들도) 20세기 모더니즘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딸은 마치 아이들이 그린 순수한 그림처럼 빨강 노랑 원색들로 꾸며진 화풍의 그림들이 아니라, 사회의 혼란 속에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들을 더 유심히 보았다. 그중에는 고전적인 의미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데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그 시대의 모든 인간이 겪었을 고통과 좌절, 외로움, 환멸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마저 불편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다.
이 미술관에서 두 아이들이 모두 가장 좋았다고 꼽은 그림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물고기와의 여정(Riese auf dem Fisch/Journey on the Fish,1934)>이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타고 어디로 가는 궁 게 신기하고, 사람의 몸이나 물건의 테두리를 진하게 그려놓은 게 멋지다'라는 게 가장 좋은 그림으로 꼽은 이유였다. 사실 이 작품은 막스 베크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거나 유명한 그림은 아니다. 나는 심지어 막스 베크만이라는 이름도 이 날 처음 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그림에는 사연이 있었는데, 막스 베크만은 나치 정권 하에서 부정적인 현실과 인간의 감정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사회를 타락시키는 '퇴폐 미술'을 한다는 죄목으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그의 부인과 함께 칩거에 들어갔다. 이 그림은 그가 부인과 칩거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자신을 탄압하는 고국을 영영 떠나야 할지,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불투명하기만 한 미래 앞에 가족만이 유일한 버팀목인 처지.
나는 이런 설명을 찾아보고 공부함으로써 이 그림을 이해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마음으로 그냥 이 그림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가 될지도 모른 채, 태어난 곳을 떠나 오로지 우리 식구끼리 부둥켜 안고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도 화가와 같은 외로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 슈투트가르트 여행기는 다음 편에 계속
막스 베크만(1884~1950)은 20세기 신 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와 독일 표현주의(Deutscher Expressionismus)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입니다.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베크만은 세계 1차 대전에 위생병으로 참전하였으며, 많은 병사들의 죽음과 부상을 목격했던 그때의 경험은 세상과 인간성에 대한 그의 시각과 더불어 화풍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명예상을 수상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퇴폐 미술의 대표주자로 낙인찍혀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의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작품 활동 내내 본인의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밤(Die Nacht)>이라는 그림에서처럼 전쟁의 참혹한 모습과 사람들의 혼란을 작품 속에 담아내었습니다.
출처/참조 : 위키피디아,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