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전 (空回轉)

ϕ 과도기적 형상

by 김은채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네. 평안에 이르렀냐고 묻는다면 마땅히 부정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 생활이라네. 늘 만나던 사람, 매일 거닐던 골목, 항시 들었던 음악까지. 나를 둘러싼 환경은 그대로네. 변한 것은 딱히 없어. 밤잠 이루지 못할 고민도, 속 시끄러운 걱정도, 어수선한 불안도 나를 감히 데려가지 못한다네. 허투루 움직이는 법 없이, 평화로이 현상(現狀)을 지키는 셈이지.


그러나 모든 것이 여전한 동시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네. 나를 오랫동안 지탱해 왔던, 확고부동한 동력이자 유일무이한 에너지였던 대전제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네. 느닷없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제 역할을 다한 성실함은 느긋한 여유로 유명(幽明)을 달리하였지. 형체는 묘사가 불가능할 만큼 흐릿하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네.




인생에 대한 공공연한 믿음 중 하나는, 인간이 선형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네. 반복은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 과정이고, 변화는 폭발적 진격의 시작점이며, 방황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실이 필요한 법. 존재 자체의 유의미함을 추종하는 것은 이름뿐인 환상, 또는 허울 좋은 소리에 가깝지 않을까. 실로 그렇게 생각할지언정 행동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네.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일정 수준의 비교는 불가피하고, 벌어진 격차에 조급함을 느끼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수순이라네. 선. 타고난 심성의 유약함이나 자기 확신의 모자람을 지탄할 필요는 없네.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애쓰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지금 달리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고,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공포. 이에 사로잡혀 잠을 줄이고 식음을 전폐하더라도 버텨야만 했던 시기. 비약적 성공을 거두었고, 압도적 생산성을 발휘하였지. 그때의 수고가 있기에 지금의 성과가 있는 것이네.




공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이를 무엇으로 충당할 것인지는 미지수라네. 기대를 저버리고, 초심을 잃어 돌변한 것으로 비춰지는 날이 올 테지.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조차 단정할 수 없네. 이토록 애매하고 불친절한 이탈은, 필연적으로 불편과 저항을 동반하더군.


무르익은 기억은 더 이상 나를 붙들지 못한다네. 세상과 발맞춘 속도를 거부하고, 나의 보폭을 탈환하겠네. 멈춰야 할 때를 알고, 가시적 지표의 부재에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제동으로 급발진을 예방하고, 내일을 위해 어제와 척지고 오늘을 버리지 않는 것. 혹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으로 남는 것을 택하겠네. 설득 대신 침묵을, 증명 대신 지속을, 운명 대신 고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