ϕ 어떠한 맹세
유독 전희가 길었던 밤. 불면은 정신이 들지 못하게끔 했고, 상념은 자꾸만 나를 간질였네. 고찰의 편린은 무작위로 돋아나는 듯했으나, 실상은 언어와 시선의 경계에 맞물린 일상적 감각의 향연이었다네. 말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했지. 느지막이 아침을 깨우는 일광(日光)을 베개 삼아 까무룩 잠이 들곤 했네.
밤낮 없이 작동하는 조명, 사흘이면 증발해 버리는 리필심, 눌러담은 내용을 감당하지 못해 부풀어 오른 일기장. 내가 자극을 다루는 방식은 대개 극단적이고 혹독하였네. 포용보다는 억압에 가까웠지. 견딤을 지속하다 한계에 다다를 때쯤이면 단식 또는 폭음, 양자택일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네. 동시에 무의미한 스크롤을 반복할 뿐이었네. 이러한 일탈은 한데 묶은 생각들을 외딴섬에 끌고 가서 묻어버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네.
파편으로 전체를 예측하듯, 하나를 보면 열은 물론이고 그 이상을 눈치챘네. 무심코 지나칠 법한 변화는 부동의 신호로 느껴졌고, 인생을 걸 만한 각성은 뜻밖의 사건이 불씨가 된다는 것을 알았네. 상처는 훈장이었고, 고통은 특권이었네. 그러나 확신이 짙어지고, 성공이 누적될수록 나를 짓누르는 반감이 거세게 불붙었네.
스스로를 통달하여 통제하려는 시도가 곧 나를 엉망으로 만드는 지름길이었음을 깨달았네. 선. 나는 타고난 무늬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네. 예민함은 재능이야. 이를 십분 발휘하여 나라는 존재의 토대를 세우고 세계의 구조를 만들었다네. 공들인 질서를 해체하고, 끝없는 무의미에 수긍했지. 마침내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응답하는 법을 알게 되었네.
흐르지 않는 비가 내리고, 근심과 입김이 구분되지 않는 계절이 도래했네. 괜스레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을 떠올리고, 각별한 사이를 유난스레 갈망하고, 미지근할지언정 온기를 그리워하는, 바야흐로 연말. 심중을 어지럽히는 사사로운 정분을 뒤로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도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잘만 흐르더군.
그대의 안부를 묻는 간단한 질문조차 삶의 아름다움을 추궁하는 독촉 같아 망설여지네. 나는 사랑이나 희망 따위의 추상 명사를 믿지 않는다네. 다만 삶을 포기할 정도로 힘들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야.
첫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느라 발밑의 범람하는 낭만을 놓치지 않길 바라. 날이 버겁네. 아프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