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하 Sep 16. 2021

복숭아

  추석 명절이다. 명절이면 흩어져 살던 시댁 가족들은 큰 집인 우리 집으로 모인다. 서울 사는 막내 시동생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수님! 저희 왔어요.” 

 두 손 가득 복숭아 박스를 들고 현관문을 성큼 들어선다. 막내 시동생은 어엿한 중학생 아들을 둔 학부모가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봐서인지 내 눈에는 아직도 귀엽게 보인다. 

  “복숭아가 맛있게 보여서 사 왔어요.”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들고 와서는 에둘러 눈치껏 포장하는 것도 예쁘다. 

  “맛있겠다. 복숭아는 아직 안 샀는데 잘 되었네요. 고마워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며 복숭아 박스를 받아 들었다. 새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복숭아다. 집안 가득 향긋한 복숭아향이 퍼진다. 문득 친정어머니 얼굴이 스친다.  

  친정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나를 낳던 해에 위 수술을 하셨다. 위를 절반이나 들어내었던 아버지는 수술 후 평생 소식을 하셨다. 위수술 다음 해 결국 제대 하셨다. 

  하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하신 아버지는 거의 집안을 돌보지 못하셨다. 다섯 명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이다. 

  그나마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식량과 양념들을 지원해 주시던 외할머니마저 서울로 떠나시고 난 후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노름빚에 술값으로 우리 형제들이 모여서 만화영화를 보던 텔레비전마저 낯선 아저씨들이 들고 가게 했다. 

  우리 가족은 광주공원 옆에 살았다. 살림 밖에 할 줄 몰랐던 어머니는 어느 날 과일 노점을 시작하셨다. 복숭아 장사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은 없어진 구동체육관 앞에 구동시장이 섰었다. 

  어머니는 명절에는 양동시장으로 갔지만, 보통은 구동 시장을 이용하셨다. 구동시장 앞에는 국밥집도 많았다. 돼지가 머리만 내놓고 있는 식당 앞을 지나갈 때는 고기 냄새가 역겨워 숨을 참았다가 빨리 뛰어서 지나가기도 했다. 

  어머니는 공판장이 있던 양동시장에서 복숭아를 사서 머리에 이고 구동시장까지 오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사람이 많아도 낯선 양동시장보다는 익숙한 구동 시장에서 노점을 해보시려고 마음먹은 것 같다. 

  하지만 마음 약한 어머니가 장사 하기는 억센 손님들과의 가격흥정은 쉽지가 않았다. 복숭아를 몇 개씩을 더 집어 가는 손님들 때문에 정작 어머니 손에 남는 것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의 복숭아 장사는 일주일을 못 버티고 막을 내렸다. 

  어머니가 복숭아 장사를 했다는 것은 내가 결혼하고 얼마 후에 우연히 외할머니에게서 듣게 되었다.

  “저 순한 것이 장사를 어찌했을거나.”

 하며 할머니는 당신의 큰딸을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많고 많은 과일 중에서 하필 복숭아를 선택하셨는지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복숭아 장사의 실패 이후로 어머니는 장사를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장사와는 당신이 맞지 않다는 걸 아신 것 같다.     

  내 기억속의 어머니는 공사장 일을 하셨다. 그리고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시면서 우리 다섯 형제들을 힘겹게 키워내셨다. 하지만 우리 집에 짙게 드리워진 가난의 그림자는 잔인한 전쟁이었다. 

  어머니 혼자 몸으로 감당하기 벅차고 고단한 전쟁이었다. 그 깊고 길었던 가난의 늪은 거머리처럼 질기게 어머니의 건강을 해쳤다. 결국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의 생이별 서곡이 되었다. 

  나는 복숭아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숭아털 때문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복숭아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마음이 편치 않는 이유도 있다. 달콤한 복숭아와 털의 관계처럼 껄끄럽다. 

  복숭아를 맨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나는 고무장갑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고무장갑도 없었다. 어머니도 분명 복숭아의 털 때문에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무거운 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큰길을 건너고 또 골목길을 돌아섰을 어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의 여린 얼굴을 뒤덮었을 땀방울의 끈적임과 복숭아털의 따가움이 뒤섞여 내 가슴을 비틀어 후빈다. 김수현 작가는 ‘배반의 장미’에서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온 방을 네발로 기어 다니며 울부짖는 여주인공에게  “자식은 무엇이고 부모는 또 무엇이냐?” 라는 명대사를 하게 한다. 

  나는 시댁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치우고 복숭아를 과일 접시에 담아 내주었다. 가족들은  “복숭아 진짜 맛있다.” 라며 금세 접시를 비우고 웃음꽃을 피운다. 

  친정 부모님을 가슴에 묻은 나는  “자식은 무엇이고 부모는 또 무엇인지” 묻는 질문 앞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숭아를 보면 여전히 먹먹해지는 가슴 한 구석을 부여잡고 그렇게 우두커니 부엌 한 구석에 서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와 손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