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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하 Sep 30. 2021

남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이혼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두 눈을 애써 피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넓은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등을 돌린 채 남자는 어둠만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다. 나도 너무 힘들다. 걱정 하지 마. 우리 아들 석이는 내가 잘 키울게. 건강 조심하고….” 

남자는 가슴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밀린 숙제를 끝낸 학생처럼 서둘러 병실 문을 나섰다. 여자가 기억하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가족사진 속의 세 사람만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웅크리고 있던 여자 안의 가녀린 짐승 한 마리가 오랜 동안 구슬프게 울부짖었던 것도 같다. 

  

 아름다운 오월의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불어주는 오후였다. 여자는 사랑하는 아들 석이와 산책을 했다. 석이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말이 조금 늦었다. 조금씩 말을 배워가는 아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신기해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말소리가 노래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손을 뿌리친 아이가 찻길로 뛰어들었다. 아이를 향해 무섭게 달려오는 차를 보았다. 순간 여자는 찻길로 뛰어들어 아이를 길 밖으로 밀쳐냈다. 하지만 여자를 향해 달려오는 차는 피할 수가 없었다. 사고 후 여자는 삼 개월 정도 의식불명이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던 여자는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크고 작은 수술들을 반복했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호수처럼 맑고 고운 두 눈을 깜빡이는 것 뿐이었다. 병실을 찾아드는 발걸음이 부쩍이나 줄어들던 남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을 여자는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저 가슴 깊숙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또 몇 해가 지났을까? 사고 이후 여자에게 시간이란 구겨진 기억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다. 모든 감각이 반응하지 않는 병실 안에서 석고 인형 같은 여자에게 시간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다만 사고 전 시간과 사고 이후의 시간만이 서로 어색하게 공존할 뿐이었다. 늙은 부모님의 길고 긴 한숨 속에 시간은 천천히 그리고 한참을, 여자 곁을 맴돌며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두 눈을 깜빡거리는 매 순간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꿈결 같은 기억의 저편에서도 여전한 방법으로 찻길에 뛰어든 아들을 밀쳐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던 그녀의 꿈을 산산이 부수어버린 그 기억 속으로, 수만 번을 되돌아가도 그녀는 여전한 방식으로 아들을 살리고 있었다. 아들을 향한 여자의 선택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여자는 오늘도 두 눈을 감는다. 이 깊고 음침한 터널 같은 악몽에서 깨어나길 기도한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무서운 가위눌림 같은 이 꿈속에서 깨어나길 기도한다.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누군가 여자에게 속삭여 주길 소망하며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이어간다. 빚 바랜 사진속의 아이가 여자 품에 안겨 들며 고운 얼굴을 부벼 댈 그 아침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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