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청첩장을 받았다. 소천하신 외할머니의 유일한 손자 00의 청첩장이었다. 마흔이 훨씬 넘었을 외사촌 동생의 결혼 소식을 들으니 외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나이 때문인가. 자꾸 눈물이 잦아진다. 주책이 바가지다. 몸은 김은하인데 마음은 외할머니라도 된 것 같다. 결혼식은 주일에 그것도 서울에서 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도 부담스럽고 주일을 못 지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일정을 조율해 하루를 비워두었다.
아침 기차를 탔다. 잠을 설쳐 피곤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설렜다. 차창 밖으로 봄비가 촉촉이 마른 대지를 적셔갔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포근한 잠에 빠졌다. 송정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릴 즈음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아들과 반가운 포옹을 나누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예식장을 찾아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들에게는 낯선 외가 친척이라 촌수와 사는 곳 정도를 미리 귀띔해 주었다. 친정 나들이가 뜸한 나로 인해 외가 친척들을 자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삼십 분 정도 일찍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하나뿐인 남동생의 결혼을 축하하는 누나 세 명은 문 입구에 있었다. 외숙모와 외삼촌 그리고 새신랑 00가 하객을 맞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며 줄줄이 태어난 손녀 세 명은 고운 한복을 입고 선녀처럼 웃고 있다. 착한 우리 외할머니도 저 이쁜 것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아들 타령에 목이 마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해 안 되는 무식한 시절을 나 또한 지나온 것 같으니 씁쓸하다. 아들이 뭐라고.
외할머니는 귀한 손자라고 항상 00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00의 얼굴은 모를 수가 없다. 미국으로 떠나 한동안 볼 수 없었던 00는 어렸을 때 귀여운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여쁜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끄는 의젓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외가 친척들은 반가이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흰머리 희끗거리는 나도 어느덧 젊은 사람들보다는 어른들 틈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었다. 외가 어른들은 내 나이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단숨에 넘나들며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꽃을 피웠다. 숫자 셈이 늦은 내 머릿속은 휘청거렸다.
할머니 치마폭에 숨던 00가 성혼선언문을 씩씩하게 읽었다. 결혼식은 주례 없이 양가 어른들의 축사로 진행되었다. 시집가는 딸에게 전하는 친정아버지의 애틋한 편지를 읽는 동안 코끝이 찡해왔다. 다음은 외숙모의 축사로 이어졌다. 오십 년 세월을 서울 사람으로 산 외숙모는 여전한 전라도 사람이었다. 애쓰는 서울 말투에 전라도 억양을 툭툭 더해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은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끝마친 학생처럼 기분 좋은 날입니다.”라는 외숙모의 인사에 결혼식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외숙모는 마지막으로 “제 이름은 0오남이고 안 사돈의 이름은 0후남입니다.”라고 했다. 양가 어머니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결혼식은 처음이다. 두 어머니의 이름에서 우리 세대들이 기억할 수 있는 묵직한 아픔이 가슴 밑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거친 세월의 풍상들이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식의 결혼식을 통해 두 어머니의 묵은 아픔을 털어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이었다. 공부를 아주 많이 했다는 우리나라 대통령님의 속 터지는 연설보다 더 멋졌다.
외숙모의 축사는 사랑하는 아들 부부가 자신이 살던 세월과는 결이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남아 우선 사상”도 많이 달라졌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떤가. 귀한 생명들이다. 우리의 고단한 세월은 나지막한 인사도 없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수많은 삶의 무게를 짊어진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었다.
저녁 기차를 탔다. 기차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기차 좌석 덕분이다. 아들이 기차예매를 해주어 역방향 좌석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내어 달리는 기차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나왔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시간의 정경 속을 헤집고 다니던 어지러운 오늘의 내 처지와 닮아 보여 혼자 웃었다. 오늘은 외할머니의 기쁜 눈물인지 오랜만에 봄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손주의 결혼식을 기뻐하실 외할머니 곁에 함박웃음을 짓는 친정엄마와 아빠의 모습도 그려진다.
“모두 잘 계시죠. 보고 싶어요. 우리 금방 또 만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