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 부인』을 읽었다. 역시 플로베르였다. 작가의 기가 막히는 문장력에 입이 안 다물어졌다. 문장에 약한 나는 좋은 글을 만나면 신대륙을 찾은 탐험가처럼 기분이 들뜬다. 하지만 보바리 부인을 덮고서는 한동안 괴로웠다. 남편 샤를르가 아내의 정부에게 던지는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운명이었어요.”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 김화영 역, 서울 : 민음사 , 2007, P502) 지금 내 눈앞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샤를르의 처진 어깨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플로베르의 시대에서 이백여 년을 훌쩍 넘은 지금 이 시대도 여전히 착한 사람은 바보로 불린다. 왜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원망할 줄도 모르고 화를 낼 줄도 모르는 걸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모든 찌꺼기를 자신의 운명으로 돌리는 걸까? 마땅히 위로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품어야 하는 것이 화가 난다. 아니 차라리 품을 수밖에 없게 몰고 가는 상황들이 더 화가 난다. 차라리 내가 먼저 포기하고 합리화해 버리는 그 바보 같은 착함에 속이 상한다. 샤를르가 말한 운명이란 단어가 우리 사회를 보는 불편함과 뒤엉켜 풀리지 않을 실타래처럼 내 속을 뒤집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삼자 변제안’을 해결 카드라고 일본 정부 앞에 내놓았다. 공부 많이 하신 대통령님의 나라를 구한 것 같은 미소를 보면서 역겹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금 지급이 어려우니 한국 기업의 돈으로 배상하겠다는 것이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가해자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경우에 따라 피해자에게는 가장 치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돈이 아까워 배상을 안 하는 것일까?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두 나라의 날카롭고 깊숙하게 패인 앙금의 골짜기를 돈으로 메우겠다는 생각은 가장 하수의 생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서로 간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때린 사람이 손이 발이 될 것처럼 빌어도 맞은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이다.
지금까지 강제 동원 피해자 어르신들이 버틴 이유가 같은 민족의 팔을 비틀어 돈을 받기 위해서였을까? 강제 동원 피해자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그분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지, 대의를 위해 소의는 귀를 막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불과 백 년 전의 역사도 인정이 안 되는 나라와 어떤 미래를 위한 파트너의 꿈을 갖는 건지, 과연 이런 식의 한일관계 정상화가 두 나라에 진정으로 무슨 도움이 되는 건지, 그러고도 나라를 구한 얼굴을 하고 싶은 건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제삼자가 되었든, 일본이 되었든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돈이면 그들의 청춘이 되돌아올 수 있겠는가? 나라 잃은 백성이 감당해야 했던 한 많은 망국의 세월을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분들의 과거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되지 않는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과거가 없다면 지금의 현재도 있을 수가 없다. 미래라는 대의명분 아래 지나간 아픈 과거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함부로 외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바리 부인』의 샤를르처럼 지난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체념하지 말자. “당신을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지난 일을 잊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나는 그 운명과 싸우다 죽겠습니다.”라고 샤를르에게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역사에 순종할 것인지 싸우다 죽을 것 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다만 도도한 운명의 물줄기를 온몸으로 거스르는 연어의 미련함이 부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