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소통에 관하여

끝이 아픈 관계라도 시작할 수 밖에 없다

by 리키디티



[컨택트 영화에 대한 내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 최근 사귄 친구가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친해지는 과정의 필수적 단계다. 모든 게 정해져 있지 않던 20대 초반엔, 그래서 미래라는 단어 자체가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30대를 시작하는 우리는 대략적으로 정해진, 한정된 옵션의, 여러 미래의 패를 손에 쥐고 '계산'한다. 십년을 더 살며 알아버린 내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돌아와 그의 고민을 되새겼다. 나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였다. 문득 올 초에 본 영화 '컨택트'가 떠올랐다. SF 영화 중에서는 내게 단연 가장 큰 감동을 남긴 영화다. 낮게 그르렁 거리던 소리의 외계인과 한 톤이 차분히 내려앉아있던 화면 색감, 시간의 교차 편집이 여자 주인공의 애잔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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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토리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본지 5개월 가량이 흘렀다. 아주 고독한 밤이 아니면 당분간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볼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원래 SF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잔상이 마치 저번주에 본 영화마냥 또렷히 살아났다. 아마 정해진 운명에 대해 최대한 담담히 순응하려고 했던 그녀의 표정이 인상깊었던 탓일 것이다.


에이미 애덤스(루이스 분)는 언어학자로 나온다. 사진의 타원형의 구체가 지구상의 여러곳에 등장하고,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에이미가 차출된다. 그녀는 소통을 업으로 하고, 소통은 관계맺음을 요한다. 외계인과의 관계맺음을 위해 다가가는 과정에서 에이미는 그들이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원은 직선이 아닌 시간의 관념을 의미했다.


'시간'이라는 관념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에이미. 그녀는 자신이 아주 사랑하게 될 아기가,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만난지 얼마 안된 남자 동료와의 관계에서 태어날 것이며, 그 남자는 자신을 떠나고, 아기는 죽게될 것이라는 미래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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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곁에 있던 남자 동료인 제이미 레너(이안 도널리 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 사람이 나를 떠날 것인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할 것인가라는 결과론적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사고 속에서 인생을 과정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이미가 에이미를 안을 때 에이미의 표정이 아직도 참 선명하게 남아있다. 복잡하고 아련한 느낌이었다.


인생의 결과란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지워보면 그렇다. 관계에서의 이별은 더 나중에 오는 사건일 뿐이다. 이미 끝난 일을 되돌아보며 아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일도 인생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행복은 지금 이곳에 있다(Happiness is here and now)'라는 평범한 말의 진리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좀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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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교훈적이고

현실은 안그렇다



인생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믿음이 인간을 여기까지 끌고왔다. 어떤 진화심리학자의 말처럼 더 착실히 미래를 준비하는 인간이 성공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뤄져왔던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대부분 미래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이 과정이라는 말은 우리보다 한참 진화한 외계인의 언어를 통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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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엔 무작정 불확실한 미래가 싫었다. 이제 어느 정도 확실한 미래의 옵션들이 등장하니 그래도 나름 '꿈'이라는 건데, 계산적으로 접근하는 내 모습이 별로다. 고민은 짧고 굵게 하랬는데 이건 뭐 길고 가느다란 것이 무병장수의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고민을 듣던 내게 루이스의 복잡하고 아련했던 표정이 떠오른 이유는 그녀를 닮고 싶어서였다.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이란 요소에 대해, 외계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녀처럼 '무기(weapon)'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위안인건 평범한 인간들도 진리에 진심으로 다가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만든다. 사람과의 관계이든 정해진 미래의 옵션 중 하나와의 관계이든 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루이스와 같이 극단적인 행복과 절망을 오가는 관계가 아니어도, 어떤 시작이든 미래의 행복과 불행을 어느정도 품고 있다. 끝이 아플 수 있는 관계라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런 관계라면 어쩔 수 없다.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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