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하고 싶은 것’ (2) 물건이 남는 것

by 김피그

대개 사람들은 ‘돈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살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딩동!

언제 산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택배가 도착했다.


기억났다.

그저께 밤, 기분도 꿀꿀한데 잠은 오지 않고,

새벽 2시까지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보다가

나도 모르게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잠든 적이 있었구나.

분명 그때는 이걸 사면서 기분 좋게 잠든 것 같은데,

오늘 다시 보니 왜 샀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물건이 왔다.

어디다 쓰려고 이걸 샀을까.

오늘도 이렇게 예쁜 쓰레기는 쌓여가고

내 지갑은 영문도 모른 채 비어 간다.


소비는 확실한 행복이라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있기에

물건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많은 의미가 있는 행동인 것 같다.

물건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필요와 소유를 넘어서

‘나’를 설명하려는 표현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가 처음으로 뭔가를 갖고 싶다고 느꼈던 건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비슷한 또래의 사촌 언니들이 많았던 나는

크면서 언니들의 옷을 종종 물려 입었다.

형편이 좋지 않던 그 시절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옷을 제때 사 입히기란 쉽지 않았을 테고,

취향이 다양한 언니들의 옷을 물려 입다 보니

예쁜 것도, 어울리는 것도, 그렇지 않은 옷들도 있었다.


당연히 그때의 나도 옷에 대한 취향 같은 건 있었을 리가 없고

아마도 주는 대로 잘 받아 입었겠지만,

어느 날 옷가게 앞에서 예쁜 원피스를 보고 서서 울었다고 한다.


“나도 내 옷 입고 싶어. 언니 옷 말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것’을 갖는다는 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 것이 없는 마음 한 구석의 서운함과 속상함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해소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릴 때야 물욕과 소유욕이 나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특히 청소년들은 또래집단에서 유행하는 신발과 가방, 아이템, 외투가 정해지는 순간

그걸 사지 않고는 그들만의 ‘사회생활’에 끼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아, 나는 그런 아이템을 갖지도 않았지만 친구도 크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더 강력한 물욕과 소유욕으로 나를 표현하는 삶이 시작된다.

사회초년생이 입사 기념으로 사기에도 버거운 명품 브랜드를

대학생들이 갖고 다니는 현실을 보면,

내 정체성 자체가 물건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씁쓸한 마음도 든다.


물론 사람은 길들인 대로 살게 된다고,

싸구려를 쓰면 싸구려 인생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가치는 스스로 높여야 한다는 말에도 일견 동의하는 바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날은 나도 모르게 차분하고 우아하게 행동하게 된다.

명품을 든 나도 명품이 되는 느낌이랄까.

물건이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런데, 나의 자존감이 정말 물건에서 오는 걸까.

물건이 자존감을 만들어주는 걸까,

아니면 그걸로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일 뿐일까.


그럼 사고 싶은 게 없는 나는,

내 정체성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존감은 그야말로 바닥인 사람이라는 말인가?


최근 6개월 간 내 카드 명세서에서

생필품이 아니면서 오롯이 나를 위해 쓴 것이 뭐가 있는지 목록을 추려 보았다.

백 번을 고민하다 산 만 팔천 원짜리 잠만보 키링 인형.

(가방에 인형 하나쯤 달아야 요즘 사람이라던데, 아까워서 집에 고이 모셔놨다.)

자라 봄 시즌오프 기간에 산 오만 원짜리 간절기 아우터 한 벌.

십 년 만에 가 본 롯데월드 데이트.

이십 년지기 친구와 다녀온 첫 템플스테이.

그리고 매 달 자동이체되고 있는 실손보험.


이 중 경험에 쓴 비용과 보험료를 제외하면 육만 팔천 원어치 물건을 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게 정말 맞는 삶인가 싶다.




몇 년 전 우연히 흥미로운 독일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제목도 심상찮은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 찾기’.


즉흥적인 내기로 모든 소유물을 버리고,

100일 동안 맨몸에서부터 매일 하나의 물건을 되찾으며 살아가는

챌린지를 진행하는 두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욕구와 생존 본능에서 필요에 의한 물건을 찾다가,

점차 물건에 담긴 추억과 의미,

소유와 행복에 대한 집착을 삶의 우선순위로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증조부모 세대에는 57가지, 조부모 세대에는 200가지, 부모 세대에는 600가지의 물건을 소유하며 살아왔다면, 현대의 우리는 1만 가지의 물건으로 생활한다.”


몇 백 배가 넘는 물건을 소유할 만큼 풍요로워진 지금,

과연 그만큼 행복해졌을까.

가진 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뭔가를 계속 사야만 할까.

물건의 개수와 행복의 양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 와중에 소유에 따른 행복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로 대비되는

물건에 대한 각자의 가치관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모든 물건은 쓰임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고,

시대에 따라 새로운 쓰임을 적절히 써 가면서 사는 것이 현재를 알차게 사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물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나를 잊는 지경에 이른다면,

한 번쯤은 정리를 하는 것도 좋다.

마음이 심란할 때 책상 정리를 하듯,

내가 가진 물건들을 덜어내고 비워내고 나면 한결 삶이 편안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리를 하기 위해

일단 깔끔한 수납장과 정리용품을 한 세트 샀다는 내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다.


정리, 그것은 비움이 아니라 또 다른 채움이란 말인가?



사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해서 내가 없는 건 아니다.

아마 지금의 나는 물건으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게 살아가는 중인가 보다.

물건이 많다고 풍요로운 것도 아니요,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만의 균형점이 절묘하게 맞춰져 있는 상태일 뿐.

물론 언젠가는 그 균형이 흔들리는 날도 오겠지.


가끔 예쁜 걸 보면 나도 예쁘다고 느끼고,

유행하는 것들을 보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그 욕망이 나를 휘두르지는 않는다.


물건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 나를 위해 물건을 사는 것인지

자신만의 기준을 명확하게 세우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앎을 토대로 새로운 물건을 사게 된다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있는 소유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사고 싶은 것이 없는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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