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문제일까,
혹은 문제라고 느껴야 할까,
아니면 문제까진 아니지만 이상하긴 한 걸까.
‘하고 싶은 것’ 이 없다는 상태를 마치 비정상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는,
반대로 우리는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것이 능력처럼 여겨지고,
기술과 시스템이 발전할수록 일과 삶의 경계는 흐려진다.
우리는 날로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 같다.
의욕 넘치는 삶을 ‘긍정’이라고 치부하면,
반대로 하고 싶은 게 없는 삶은 ‘부정’ 이 될 수밖에 없는 걸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부터 출발한 의지라면 좋겠지만,
그게 사회가 요구하는 부담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사실 몇 년 전의 나는 이랬다.
뭔가를 하긴 해야 한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슬슬 강박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뭔가’를 시도해 보려고 준비하면,
마음속에서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지금 눈앞에 펼친 이 일이 맞나?”
“혹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결국 오늘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나는
또 한 번 불안한 마음에 빠져든다.
조금 마음이 편안한 날에는
‘뭔가’를 결정해 보기 위해 노트에 끄적여본다.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
오래전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들이
봇물 터지듯 펜 위로 흘러나오긴 한다.
나는 일상의 모습으로부터
내 안의 생각과 마음을 소통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쓰고 싶은 주제도 많고, 실제로 여기저기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도통 한 곳으로 모아지질 않는다.
한때는 그림을 그리고도 싶었다.
손에 붓과 펜을 잡을 근육은 없으면서도
머릿속으로 내가 그려볼 그림의 화풍을 자유롭게 떠올려보곤 했다.
색깔과 함께 캔버스 위로 흘러가는 피사체를 상상해 보지만,
화방에 가서 색연필 한 자루 사 본 적도 없다.
가끔 일에 관련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작정 테스트해 보던 십여 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그거 해서 뭐 해’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아이디어를 접어버린다.
그러는 와중에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초조함이
점점 절박함으로 변하며 실체 없이 나를 괴롭힌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은 책이 있어 펼쳤는데,
눈은 검은 활자를 향하지만
생각은 ‘이거 말고 다른 책도 보고 싶었는데, 그걸 볼까 그냥 이걸 볼까’ 갈팡질팡이다.
생산성은 없고 창의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잡생각이 피어오르니
손에 잡은 책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한때 집중력이 꽤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겉마음과 속마음이 끝없이 어긋나는
껍질 많은 양파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조차도 나를 판단할 수가 없다.
질풍노도 같던 잡념의 휘몰아침이 몇 년 지속되더니
곧 평온이 찾아들었다.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생산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스스로를 내려놓은 것이다.
어쩌면, 어떻게 생각해 봐도 마음의 갈피를 하나로 모을 수 없으니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에서 조금 떨어지고자 한 것이다.
알 수 없이 절박한 끈을 놓아버리고 나니
잔잔한 호수 위에 표류하는 조각배가 되었다.
일렁이는 파도도, 거센 바람도 없이
편안한 배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루는 고요하다.
그러나 조각배는 온 곳도, 갈 곳도 없이
호수 위에 가만히 혼자 떠 있을 뿐.
우울하고 슬프진 않지만 행복이 넘치는 삶도 아니고
하루하루 잘 흘러가지만
갈 곳을 잃은, 혹은 가는 곳을 잊은 내가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을 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 모든 상태가 만족스러우니 오늘 하루도 만족스럽게 살아갈 뿐,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 어쩌면 원하는 걸 다 갖춘 완전한 상태여서이지 않겠어?”
과연 이게 자기만족이 이미 충만해서일까.
나도 걱정이 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도 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도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어떡하지.
혼자서 속으로 되뇔 뿐.
그나마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라고
책망하지 않은 친구에게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단지 내가 두려운 것은 하나였다.
언젠가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나의 이 젊은 날이 사무치게 아까울까 봐.
젊음은 유한하고,
에너지 넘치게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에도 때가 있을 텐데,
그때를 허무하게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함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혹은 언젠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
물밀듯이 밀려오는 지난날에 대한 상실감에 스스로가 실망할까 봐
미리 겁을 먹은 것인지도.
갈피를 잡지 못한 내 마음을 놓아버린 건 나인데,
놓아버린 나의 지난날을 후회할까 봐 고민하다니—
빠져나갈 수 없는 딜레마를 스스로 만든 꼴이다.
그러던 어느 날,『행복 강박』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에게만 부여된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중요시하며,
이성에 합치하도록 고결하게 살면 내적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현대에 지나치게 낙관주의를 숭배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조건적 긍정’을 주창하는 자들이 말하는 행복이 들뜨기 쉬운 쾌활함이라면,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마음 상태는 ‘평온’이다.
평온은 기를 쓰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을 담담하고 무심하게 받아들일 때 생긴다.
부정적인 감정과 경험을 회피하지 않고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평온을 성취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 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내가
꼭 그 ‘평온’에 가까운 상태는 아닐까 느껴졌다.
행복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불확실성을 즐기고 불안을 포용하며 실패에 익숙해지고 죽음에 가치를 두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통해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이
마치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와,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는 나를 두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이 과정이
단순히 삶의 의지나 의욕이 없는 상태,
혹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강박에서 오는 불안만은 아닐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를 알아가는 이 과정을
더 이상 압박이나 강박의 수준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해야 한다’는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속에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 발자국 더 멀리서 지켜보아도 괜찮겠다.
그렇게 오늘도,
긍정의 자기 합리화 속에서 하루가 흘러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오늘이
어쩌면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낸 하루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