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완벽주의와 게으름은 공존할 수 있는가

by 김피그

사실 브런치 작가 신청은 작년 봄에 했다.

나는 무려 1년 반 전부터 브런치 작가에 선정된 사람이었는데,

첫 글을 쓰는 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당연히 작가 신청 때 썼던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쓰고 싶은 주제도 점점 변해갔지만,

그보다는 과연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이 떨어졌던 게 더 맞는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것이

나 혼자만 보는 일기장에 쓰는 것과는 물론 다르지만,

당장 서점에 놓일 책을 출간하는 것도 아니고

교차검증이 필요한 학술논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첫 글을 쓰기가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더욱 오래되었다.

세상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언젠가 내 이야기도 세상에 선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연히 머릿속에서만 맴돌며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 많은 ‘글감’이 생겼지만

막상 노트북을 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막상 첫 번째 연재 브런치북을 열고 나니,

모든 우려가 괜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허무하면서도 조금은 웃겼다.




세상 모든 행동을 MBTI로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파워 J형인 나의 성향이 완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J형을 계획과 목표지향, P형을 유연함과 융통성으로 파악한다지만,

큰 틀에서의 차이점은 역시 ‘자기 통제성’에 있는 것 같다.

J력이 꽤 높은 나의 경험을 되짚어보자면,

(30점 만점인 선호 분명도 지수에서 나는 27점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을 경우를 위한

다양한 장치 마련에 더욱 신경을 쓰는 편이다.



여행을 갈 때는 전체적인 루트와 세부 일정을 고려하되,

날씨나 현장 상황에 따라 루트를 변경할 경우에 대비한

Plan B와 Plan C 정도를 함께 마련한다.

대신 세부 일정은 빡빡하게 잡지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빡빡하게 계산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을 경우에 받을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대신 여유가 생길 경우에 할 만한 것들은 당연히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공부나 일을 할 때도 마감일을 확인한 뒤

그 날짜로부터 해야 할 과제의 양을 미리 나눠 적어둔다.

혹시 변수가 생겨 그날의 분량을 미뤄야 할까 봐

중간중간 여유시간도 미리 잡아둔다.

계획을 지켰을 경우

여유시간들이 넉넉하게 남아 마음이 편할 테고,

계획을 지키지 못하게 될 때는

그럴까 봐 잡아둔 여유시간이 있기 때문에

결국 계획을 지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계획적인 것을 넘어서,

계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애쓰는

자기 통제적인 성향이 J형의 특징이 아닐까.



나날이 고집이 세지는 건지, 통제적인 성향은 점점 강해진다.

이제는 뭔가를 하고자 할 때면

계획에 따라 시작해서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이게 정말 강박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애초에 완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에 대한

회피 기전의 발동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기준만 높아져서

언젠가 준비 완료된 내가 되어 이 일을 하기를 기다리고 미루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어차피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엔

시작하지 않는 게 효율적이라고 자기합리화하는

극도의 효율주의자.

시련을 극복할 회복탄력성이 부족해서,

다시 일어설 ‘꺼리’조차 만들길 꺼리는

비겁한 겁쟁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감정도

굉장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를 내거나 속상하고 서운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갖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화내고 서운하고 힘들어해 봤자

어차피 그것들은 내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화를 내거나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는 빈도를 점점 줄여나갔다.


부정적 감정이 적어질수록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졌고,

마음의 평온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감정의 롤러코스터조차 불완전하게 느껴져서,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쪽을 선택한,

일종의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인 것인가.


내 감정조차도 완벽한 상태가 유지되지 않을 바엔,

변화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만 적응해 가는 것 같다.


한 번쯤은, 이런 나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지향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많이 겪고 많이 이루고

많이 가질 수 있으면 더욱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열심’에 반대되는 모습을

마치 부정적인 것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게으름, 나태, 핑계, 회피.

나를 안팎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한 번쯤은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줘야지.



오랫동안 생각만 하던 브런치 작가의 꿈도

어느덧 이렇게 이루는 날이 오듯이,

지금은 내 비록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시작할 때가 올 테니.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사실조차 쿨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게 나를 움직이게 할 첫 번째 용기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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