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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Jul 20. 2022

이 작은 별의 숱한 작별들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① 김영하 <작별인사>

살면서, 살아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건 모든 게 다 우주라는 것이다.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가 우주고, 연주하는 이의 선율이 우주고, 그리는 이의 색채가 우주, 요리하는 이의 음식이 우주, 사랑하는 이의 눈빛이 우주, 쓰는 이의 이야기가 우주, 숨 쉬는 이의 모든 순간이 우주다.







엊그제 채널을 돌리다 tvN <벌거벗은 한국사>를 봤는데 영조가 삼간택을 할 때 마지막 시험 질문으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고 한다. 훗날 정순왕후가 된 이의 답은 "사람의 마음"이었다고. 이 말을 계속 생각해 본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람의 마음. 깊다면 얼마나 깊을까. 한 길 물속보다 깊은 열 길일까. 육지보다 더 미지인 곳이 심해라 한다. 가장 깊은 바닷속에 무엇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많은 산소와 적정량의 압력이 필요한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곳, 심해와 하늘 끝의 끝. 그러나 우린 계속해서 파고들고 덤벼든다. 뛰어들었다 녹아버리는 소금인형이 되기도 하고 날아올랐다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깊고 넓고 높은 곳은 심해도 하늘 끝도 아닌 우리의 마음이겠다. 뛰어듦은 허락되었으나 정의됨은 허락되지 않은 것, 그런 곳.




우리는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온몸을 압도하던 공포가 물러가고, 이제 슬픔이 마치 따뜻한 물처럼 그녀의 마음에 차오르는 느낌이었고, 그 슬픔이 오직 선이만의 것은 아니라는 듯,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이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느끼고 있을 유독한 슬픔이 아주 소량이나마 내게로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와 나, 그런 뚜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공통의 슬픔이라는 압도적 촉매를 통해 선이와 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김영하 <작별인사> 중에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미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질 때 혹은 나라는 존재감과 세상의 공간감이 하나가 될 때. 그림자에 서서히 빛이 들거나 반대로 빛에 서서히 그늘이 지거나 선과 색 사이를 문질러 흐릿하게 만들거나 웃음 중에 눈물이 흐르거나 울음 중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살아가며 죽음을 느끼거나 소멸해가며 살아있음을 느낄 때처럼 말이다.


<작별인사>는 존재한다는 건 무엇인지, 진정으로 존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라는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원초적인 질문을 남긴다. 존재에 대한 고뇌는 문학의 시작이자 철학의 근본이고, 살아있는 한 뗄 수 없는 것이다. 심플하게, 가볍게, 재미있게 혹은 무의미를 추구한다 해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모든 시작은 존재에의 고뇌다. 휴머노이드, 미래 세계, 인간이 소멸한 어느 날의 지구를 다룬 이 이야기를 읽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정확하게는 "to be or not to be"가 떠올랐다면 작가 본인도 의아해할까.







그러나 최진수가 철이를 키운 혹은 관리한 모든 과정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선이가 민이를 아끼고 애틋해하며, 다시 그 애의 생을 이어 붙이고자 한 집착 또한 존재에 대한 애착이었다.

무엇보다 철이가 스스로를 몰랐고 알고 알아가는 이 이야기 전체가 존재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럼 <작별인사>가 제시한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과 '이야기'다. 가장할 수 있다는 점과 끝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닮아있는 두 가지.




"마음이라.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기억일까요.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요? 또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뇌나 그것을 닮은 연산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어지러운 환상일까요?"

김영하 <작별인사> 중에서




인간에 냉소적이고, 휴머노이드 존재의 양식을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가치를 둔 또 다른 휴머노이드, 달마의 말이다.


우리는 인간과 로봇의 가장 큰 차이는 진정한 감정의 유무라 생각한다. 인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도 감정과 감성을 품거나 표출할 수 있는 반면, 로봇은 정해진 방식을 통해 예상 가능한 결과를 도출하기에 '고철'처럼 차갑고 딱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마의 이 냉소적인 말에서 진정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 어쩌면, 만약 이 이야기가 현실이거나 혹은 미래라면 정말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무슨 말인가 하면, 달마는 이미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본 적 없는 휴머노이드 달마가 마음의 보기라며 읊은 기억, 데이터 뭉치,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 집합, 연산 장치가 만들어내는 환상, 이 모든 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내가 혹은 우리가 존재의 본질로 추구하는 '마음'이다. 달마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인간들의 연구와 발전과 좌절과 자멸을 지켜보고 있으나 그도 모르는 사이, 아니 어쩌면 애초에 프로그래밍되어있길 그 강은 서서히 메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별인사>의 우주 속에서만큼은 인정하겠다.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고작 생산 방식이 다를 뿐 공통분모가 훨씬 많다.


로봇 고양이 데카르트를 진짜 고양이로 받아들이고, 아니면 진짜 고양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진짜 고양이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이 지내는 다른 고양이들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창조물인 휴머노이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생각해 본다. (휴머노이드도 결국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니 결국 가장 어리석은 건 인간이겠지) 애초에 존재와 존재 사이 경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 움직이는 것과 멈춰있는 것 사이, 궁극적으로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경계는 없거나 있더라도 모호한 것인데 인간의 고민과 탐구가 굵은 펜을 들고 마구 선을 그어버린 것일 수도. 그런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놓고, 그에 대해 또 고민하고 탐구하는, 그렇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며 스스로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북도 치고 장구도 치는. 스스로 병도 주고 약도 주는.


하지만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이 어리석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또 인간의 갖가지 특수성을 만들어내 인간을 유일하게 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또 사랑스럽게도 한다.


철이는 최진수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피부로 느꼈고, 선이를 통해 사람의 사랑스러움을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 뿐이기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김영하 <작별인사>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우리와 작별 인사 중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생과 사의 개념을 넘어, 인간이 인간이란 이름과 인간성이라는 근본으로 이 세계에 '존재함'과의 작별 인사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안녕" 두 음절에 치러질 작별이 있는 반면, 세기가 지나도 이어지는 작별도 있다. 그건 새로운 발견이거나 놀라운 진실일 것 없이 늘 우리의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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