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셰익스피어의 해파리 관찰일지

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

by 김프피


어제 발견한 짤이다. 해파리는 힘이 약해서 헤엄을 치지 않고 파도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힘이 약하면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힘내는 걸 하지 않고 파도를 따라 가는 게 맞는 거다. 금주의 나는 해파리에게 삶을 배웠다 할 수 있겠다.


엊그제 퇴사를 했다. 아니지, 당했다. 아닌데... 반은 자발적이었고 반은 강제적이었다. 4년 근무 후 이직한 새 회사가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아 한 달을 채우고 "8월까지만 근무하겠다" 퇴사 의사를 밝혔는데 그 다음날 퇴근 한 시간을 앞두고 "오늘까지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화려한 아르바이트 경력과 5년 남짓의 사회생활 경력을 통틀어도 짧다면 짧지만 그래도 퍽 다양한 일을 겪었는데 이와 같은 건 처음이었다. 네이트판이나 잡플래닛 블라인드 게시판에서나 읽을 법한 남의 이야기 같은 것에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여전히 그 시점을 생각하면 벙벙하다. 외국인이 외국말로 하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랄까.


원하는 게 조용히 사라지는 것 같으니 인사도 않고 티 없이 사라지겠다 말하고 사무실을 나온지 나흘 째. 약간은 게으르고 백수치곤 부지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고백하건데 이상하리만치 위기감이 없다. 당장 다음달에 내 몫으로 할당된 수입이 반 가까이 줄어들었음을 알고 있으나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다. 두 손을 펼쳐서 멀끔한 손바닥을 쳐다보자. 왜 비어있는가 하는 의문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홀가분하지도 않다. 굳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말하라면 그런가보다, 혹은 잘 있구나 하는 미지근함이다. 속 편하다며 스스로를 몰아세울 일도 없다. 속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마치 해파리가 된 것만 같다.





뭔가를 하는 것에 시큰둥해진 요즘이다.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면 허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의자를 두고 멍하니 있는 일이나 시원한 물에 둥둥 떠있는 일이다. 글로 쓰다보니 떠올랐는데,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해준을 재우며 해파리의 헤엄을 묘사했다. 그럼 나는 잠이 들고 싶은 걸까. 해준이 영 청하지 못했던, 서래와 함께 발견했고 서래와 함께 잃어버린 숙면을 원하는 걸까.


해파리는 헤엄을 치면서 생존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헤엄은 어떤 행동이라기보다 상태에 가깝다. 힘의 소모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 해파리는 힘이 약해 파도를 이겨내는 대신 올라탈 뿐이니 말이다. 사람들 사는 일도 해파리의 헤엄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힘과 등가교환한 행동만이 살아있음의 증명이 아니라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감의 충분한 증거가 된다면 좋지 않을까. 다수가 세기에 걸쳐 읊어대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있음(to be) 또는 없음(or not to be)이니 말이다.*

* to be or not to be. -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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