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
내 생일은 대부분 흐렸다. 흐렸던 생일만 기억하는 걸 수도 있고. 가장 서러웠던 생일을 꼽자면 20살인가 21살 때인데, 장마라 비가 종일 내리던 날 편의점 저녁 아르바이트를 했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폭우가 쏟아지기에 바람에 날아간 매장 앞 박스들을 정리하느라 원치 않게 젖었었다. 행복해서, 즐거워서 쓰게 되는 감정과 분노, 슬픔에 쓰는 감정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생일이라고 하면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고 또 그런 기억이 있는 것도 분명한데 꼭 그날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씨유의 보라색 조끼를 입고 박스를 정리하는 갓 성인의 나.
언제부턴가 생일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됐다. 웃기게도, 내 생일에만. 가까운 사람들의 생일은 꼭 가장 먼저 축하하고 싶고 마음에 들만한 선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생일엔 감흥이 없어졌다. 근데 미련을 아예 버린 건 아닌지, 이것도 결국 모순된 마음인데 그냥 가버리는 건 아쉽다. 그렇다고 뭘 딱히 하지도 않으면서.
누구는 살아갈수록 이런저런 일 겪으며 주변 사람이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 어쩌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 '지인 영역'이 좁아진다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회생활하며 얕게나마 사귀게 된 사람이 늘고 내가 예의를 차리는 일도 그쪽이 내게 예의를 차릴 일도 많아져 생일 같은 걸 축하받는(진심과 속이 빈 인사치레를 떠나) 경우도 많아졌다. 어느 순간 내 생일을 그렇게, 적당히 예의만 차리면 되는 사람의 생일처럼 여기게 되었달까.
그래도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내 생일을 대하는 내 마음이 이렇다 보니 주변의 마음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를 느낀다는 것이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블루베리 케이크를 사는 마음이나 보라색 옷을 입고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보라색 꽃을 사는 마음, 선물에 뭐 하나를 더 챙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마음, 너의 날이니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너 먹고 싶은 거 먹자는 마음, 가만히 앉아 뭘 지긋이 하지 못하는 성격이면서 한 바닥 가득 편지를 써주는 마음, 삼복더위에 가까운 날 이른 시간부터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 마음. 전엔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축하의 말을 참 크게 느꼈는데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다행이라 느낄 수 있는 스스로의 마음이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분명 모난 구석이 있을 테고 찾아보면 많을 테지만 아주 못되지는 않아서 태어난 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구나 싶어서.
"나 생일이야! 맛있는 거 먹자!" 해도 유난스럽지 않을 곳이 없어서 혼자 보낼 참이다. 다시 한번 도전해볼까 한다. 내가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맛의 케이크를 사서 촛불은 딱 하나만 켜고, 소리를 내도 누가 들을 일 없으니 소원을 크게 말할 것이다.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는지도 새삼 되새겨볼 것이다. 다시금, 생일이 내게 좋은 핑곗거리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축하해하고 기특해하고 예뻐하는 저녁을 보낼 예정이다. 혼자 생일을 보내게 돼도 서럽거나 외롭지 않은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