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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Aug 29. 2022

어린이를 어린이로 남기는 세상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④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조카들에게 요즘 내가 읽는 책이라며 소개했다.

이모는 요새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읽고 있어. 어떻게 하면 너희랑 더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서 고른 책이야.


큰 애는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데, 나와 끝말잇기를 하다가 <자산어보>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물고기 도감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정약용은 <마과회통>을 쓴 실학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과회통>이 역병을 다룬 책이라는 것도 물론. <목민심서>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다음엔 <목민심서>를 읽어보고,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은 나에게 소개해달라고 했다.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고기와 책과 게임과 로봇을 좋아하는 내 예쁜 아이.

얼마 전엔 작은 조카의 생일이었는데 아침 일찍 생일 축하한다고, 이모의 조카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모도 제 이모가 돼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지난여름, 내 생일날 아침 일찍 "이모 전화할 수 있어요?" 메시지를 보냈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던 아이. 이모가 어떤 이모가 되었으면 좋겠냐니까 지금의 이모가 좋다는 아이.

나는 사정상 연년생인 조카들이 각자 걸음마와 우다다 달리기를 시작하던 시기부터 함께 살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 애들이, 그 애들에게 내가 익숙한 존재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애들에게는 나와 함께 산, 함께 자란 시기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겐 흔치 않은 만큼 귀한 시간이었고, 배움의 새로운 경로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좋은 어른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과 약자의 연대, 조건도 대가도 없는 마음의 원천 같은 것들. 그리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감동.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게 한다. 그간 나는 어떤 어른이었는가. 물론 나는 아직 나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고, 어쩌면 평생 어른이 되긴 글렀다 생각하지만 조카들에게만은 그럴싸한 어른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더 욕심내도 된다면 조카들뿐만 아니라 내가 살면서 마주할 혹은 마주하지 못하더라도 같은 세상을 살아갈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들이 순수하게 정의하는 '어른스러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른이 생각하는 어른스러움과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스러움은 많이 다르다. 사실 어른(연령으로만)의 어른스러움 지론은 다소 이기적이다. 스스로를 멋져 보이게 할만한 요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린 결제를 망설임 없이 하는 모습을 보며 어른이라 말하기도 하고 힘들 때에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혹은 마시고 싶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참는 걸 보고 어른이라 말하기도 한다. 좀 더 보편적인 면에선 사회생활의 역경을 쿨하게 견딜 때, 흔들릴 법한 일을 의연하게 넘길 때, 슬럼프를 담담히 견디고 성장할 때 스스로를 "어른 다 됐네"라 평가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어른의 조건은 전부 어른이 된 자기 자신을 위한 것들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자신의 품위나 자신의 컨디션을 위한 것들. 나쁘다는 거 아니다. 분명 필요한 일이다. 우리 개인적으로 말이다. 개인이 개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그럼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 어렵지 않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지만 복잡하거나 모난 결이 없다. 반듯하게 깊고 반듯하게 다양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자신들보다 더 많은 걸 아는 사람,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자신에게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아직은 자그마한 자신보다 커다랗기 때문에, 자그마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보호할 수도 있는 사람을 어른으로서 필요로 한다. 결코 자랑할만한 것을 더 많이 가졌고 무엇이든 더 잘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은 자신보다 커다랗고 자신보다 똑똑하고 속이 깊은, 그러나 사람이다.

어린이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는, 오래 보내며 어린이들의 안위를 살펴야 하는 직업들을 나는 성역처럼 바라본다. 올바른 가치관과 직업의식을 갖고 종사하는 그들은 현생에 나타난 한 명의 작은 신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린이들을 마냥 아름다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는 겪어봤다면 알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서, 그들을 향한 약간의 부러움이 생겼다. 동경 같은 것. 어린이들과 오래 마주해야 하는 일은 내 생에 있을 수도 없고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어린이들이나 그 직업들에 부정적인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내가 그런 것에 임하기엔 오조오억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거다. 아무튼... 독서교실을 하며 어린이들과 함께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어린이라는 우주를 떠돌고 좋은 어른이라는 청사진을 그려보는 작가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가 어린이와 친하든 어색하든,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다'.
절망의 말을 내뱉기 전에 어린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어른들이 아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말끔하고 담백하다. 거치는 것이 없이 오롯한 것들. 일례로 우리 큰 조카는 나와 산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내 "높은 산에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하는 추임새에 뭘 그런 걸 다 묻냐는 듯 "먼저 내려와야죠!" 하고 대답했다. 정말, 정말 당연하고 깔끔한 대답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간과할 수 있는 당연한 것들. 아이들은 그런 걸 깨닫게 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걸 가르쳐준 다기 보다 우리들 안에 분명 있지만 사는 일이 견디는 일로 변질되며 뒷길로 밀려난 것들을 다시금 끄집어내준다. 상기시키고, 경종을 울린다.


약자가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가 안전한 세상이다. 나는, 아이들과 동식물이 거리낌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게 바로 지상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머나먼 뜬구름 같지만, 꼭 붙잡아서 흩어질 구름이 아닌 오래 존재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모습. 어른스러움은, 어린이들이 웃고 놀기에만 바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고 그런 애를 썼는가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본다. 어린이들이 있다. 자라나 이 사회를 이끌고 세상의 주역이 될 존재들 말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작고도 큰, 순수하고도 단호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우리의 앞에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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