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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Aug 05. 2022

예민하고 다정한 사람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③ 황정은 <일기>

시인은 나무에 열린 자두 한 알에도 감동을 얻어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앙드레 지드가 말한 적 있다. 어디서 말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느 책에서 본 건데 어느 책에서 본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소설가는 예민한 사람이다. '예민하다'를 국어사전에선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이 '날카롭다'라는 말의 끝을 약간 사포로 갈아야 한다. 그래야 소설가를 표현하는 '예민하다'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성격이 예민해"라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격이 예민하다고 해서 신문 헤드라인 한 줄을 읽고 인간, 사랑, 성, 신의 개념을 아우르는 거대한 희곡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연극 <에쿠우스>의 창작 일화는 아직도 나를 놀랍게 만든다. 나를 패닉에 빠뜨린 그 블랙홀 같은 작품이 한 줄의 헤드라인에서 시작되었다니.)






6월 7일.
한밤에 책이 쓰러지는 소리에 잠에서 깨곤 한다.
책들은 왜 그런 소리를 내며 넘어질까. 딱,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이다가 가보면 북엔드로 눌러두지 않은 책이 넘어져 있다. 그러면 나는 흡족해 책을 도로 세워두고 자러 간다. 방금 넘어진 책 속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고 상상하면서.

- 황정은 <일기> 중에서






소설가, 콕 집어서 말하자면 <일기>로 첫 에세이를 출간한 황정은은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의 세포 중 적어도 세 개 이상은 남다르리라 짐작한다. 그의 최근 소설집 <연연세세>에 담긴 이야기들은 물론 내가 가장 행복해하고 가장 애틋해하는 소설 <백의 그림자>도, 그건 그의 기억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고 있다. 창작 일화를 인터뷰에서 들은 것도 아니고 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읽은 것도 아니다. 작품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기억 있는 그대로를 소설로 쓴 것은 아닐지라도 그건 분명 그의 기억이다.


소설은 자화상과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의 문학이란 과목은 소설은 허구가 주된 것이고 수필이 자기 경험에 따라 사실과 가깝게 쓰는 것이라 가르쳤지만 가만 보니 쓰이는 모든 글은 쓰는 이 자기, 혹은 자기 경험에 입각하여 탄생한다. 또 그중 소설은 가장 잘 그려진 자회상이다. 소설은 귀가 잘린 얼굴을 붕대로 감은 반 고흐의 자화상과 같다.












나는 황정은의 평정하지 않은 평정심이 좋다. 그러니까 그건, 맑은 날 동해의 파도다. 드세지 않고 일정하기에 잔잔하다 할 수 있으나 파도가 치고 있다는 건 가만히 있지 않다는 뜻이다. 황정은과 황정은이 그린 자화상들은 무표정으로 분노한다. 무표정의 분노는 아주 차가워서 화상을 입힐 수 있다. 입을 꾹 다문 외침은 이미 존재의 너머에서 날갯짓을 시작한 나비효과다.


그는 에세이도 소설처럼 쓴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에세이도 소설도 다 자기와 자기 경험을 기반으로 쓰이니까. 나는 이 시점에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소설가가 있고 소설이 있는 것인가? 소설이 있고 소설가가 있는 것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 물음은 소설 쓰는 자의 영원한 2번 문제일 것이다. (1번 문제는 아마도 '문학이란 무엇인가'일 테지)






세월호가 맹골수도에 가라앉은 뒤로 봄이 되면 진도를 향해 내려가는 길에 만개하는 벚꽃을 "쥐어 뜯어버리고 싶었다"던 유가족의 말을 생각했다.

- 황정은 <일기> 중에서






황정은이 쓰는 이야기가 꾸준히 질척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따금은 질척하고, 이따금은 딱딱하고, 이따금은 나풀거려서 좋다. 그의 나날이 그렇다는 것이니까. 언제는 노랗고, 언제는 하얗고, 언제는 검다는 것이니까. 언제는 식물 같다는 것이니까. 언제는 무생물 같고, 언제는 빗물 같고.


또 언제는 눈물 같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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