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정신과에 간 게 언제였더라. '가볼까' 생각만 하다가, 퇴근길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걸려있는 개원 홍보 현수막을 보고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더랬지. 혹시 퇴근길에 느껴지는, 그 갑갑하고 막막하고 차분하고 습한 기분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니 내일까지 기다려보자 했었는데 아, 생각해보니 '가볼까'라는 고민을 이미 여러 번 했지 싶었다.
그렇게 처음 간 정신과에선 딱 한 번 진료를 받고 이후엔 가지 않았다. 진료나 처방이 별로인 이유는 아니었다. 한 번 가보곤 그런 걸 판단할 수 없으니까. 그냥, 보통 병원과 다를 게 없어서. 정신과도 의료시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나는 정신과 진료실의 분위기는 덜 사무적이고 덜 차갑고, 떠다니는 공기가 + 모양을 한 게 아니라 그냥 투명한 동그라미이길 바랬던 것 같다.
첫 번째 병원에서도 그렇고 지금까지 1년 넘게 다니고 있는 곳에서도 내가 받은 진단은 같았다. 불안증과 우울증.
내가 당사자가 되면 그것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울증은 말 그대로 우울한 상태가 지속적인 것이겠거니 했지만 불안증, 불안장애라는 건 좀 모호했다. 여전히 그렇고. 늘 불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기엔, 나는 늘 불안한 상태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표면적)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숨이 갑갑하게 쉬어졌고, 특히 자려고 누웠을 때 그 증상이 심해지곤 했다. 이대로 잠들면 지금 이렇게 쿵, 쿵도 아니고 꿍, 꿍 뛰는 심장이 멎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에 몸이 피곤해도 쉽게 잠들지 못했고 때론 잠이 들었다가도 (역시나 표면적) 이유 없는 두근거림에 놀라서 깨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까 이따금씩 말이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약이나 상담,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때의 나를 헤아려보게 된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잠들기가 무섭고, 겨우 잠이 들어놓고는 얼마 못 가 다시 깨 홀로 새벽에 고여있는 일이 잦았던 그때의 나. 그럴 땐 내 테두리가 흐려진 것만 같다. 운동장 모래에 돌로 그은 선이 헛디딘 발로 지워진 것처럼.
김석의 <불안>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는 불안이란 건 직접적 반응이라기보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 상태라고 썼다. 물론 저자가 책을 통해 논한 불안도, 내가 앓으며 나아가고 있는 불안증의 불안도, 물건이 떨어질 듯 위태롭게 놓여있는 모양이나 그걸 지켜보는 마음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에서 불안한 눈빛보다는 앞선 가사인 거친 생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뭐, 거친 정도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서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안함, 즉 어떤 '거친 생각'이 아주 가신 건 아니다. 언급한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불안은 병리적 증상을 낳기도 하지만 살아감을 살아감답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고. 물론 이는 나처럼 나아진 상황에서 논할 거리다. 그러나 불안증을 건너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에 공감하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없다. 불안은 내 일부가 되었다. 한창 앓던 때의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까지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불안증, 우울증 같은 병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그 증상으로 만든 분신에게 마음을 세주고 산다. 그 분신이 문 열고 나오면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문을 닫고 들어가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주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스로를 살피게 된 건, 마음의 문을 내가 먼저 열고 들어가 그 안에 사는 분신을 가만 바라보고 토닥이고 쓰다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불경의 말은 외로우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나로서 내 안을 걸으라는 뜻이리라, 그렇게 믿는다. 내가 나로서 사는 나의 안엔 불안이 살림을 차렸다. 나의 불안은 이제 낯섦의 영역에서 세 발자국쯤 멀어졌다.
아,물론 불안은 파도와 같아서 밀물과 썰물의 연속일 테지만. 그래서 언젠간 또 잠겨죽어버릴 것만 같은 때가 올 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