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갱 Jan 06. 2022

혹시 남편 따라 이민 오셨어요?

내 가치는 스스로 지켜내자.


2년 전, 처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정말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와 탈조선 부럽다.' '나는 그래도 미국에서 살긴 싫던데, 한국이 좋지.' '어차피 미국에서 살 건데 남편 군대는 왜 갔어?' '영주권 부럽다. 남편 잘 만났네.''가족도 친구도 없이 어떻게 살아.' 등등

우선 남편은 한-미 이중국적자로 한국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고 현재 이중국적을 유지 중이다. 이 정보들 이민 거진을 만들다뤄보려 한다.

여하튼. 한국을 떠나 살아 보니, 이민자의 삶이란 결코 쉬운 일도 쉬운 결정도 아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못할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단, 신분 문제가 잘 해결되어야 하고 같이 살 사람과의 의기투합이 가장 중요하다. (나 홀로 이민은 내가 모르는 영역이기에 말을 아낀다.) 나는 솔직히 남편과 함께라면 오지에 가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사랑해서, 이 사람만 있으면 되서라기 보다 둘이 함께면 뭔들 못할까 싶은 마음에서다. 그만큼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믿 때문이다.

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해낼 의지가 있으며 제나 긍정적인 마음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가족 혹은 부부는 개인이 아니라 한 팀이 되어야 한다. 든 결혼 생활이 그렇겠지만.




2019년 가을, 우리는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첫 신혼집을 구했는데, 프린스턴 대학교가 근처라 안전하고 조용한 동네였다.(현재는 텍사스주에 살고 있음) 남편은 한국에서부터 직장을 구하고 넘어왔기에 랜딩 한지 사흘 만에 호텔에서 출근을 했고, 주말에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남들은 어머 너무 힘들었겠다 하는데,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다. 모두가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기에 재밌었고 나중에 두고두고 추억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던 날들이 지나가고 평화롭던 일상의 어느 날, 깜깜한 새벽에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아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오늘도 남편은 출근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나 혼자네?' '앞으로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답함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밀 없는 부부 사이지만, 번만큼은 남편에게 내 짐을 함께 져달라고 말하기 싫어 며칠 속앓이를 했다.


난 어릴 적부터 눈에 띄길 좋아했고 무슨 일이던 주도적으로 해내는 것을 즐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을 도맡아 했으며 대학교에 가서도 별명이 '핵심이'였을 정도로 한 무리의 중심이 되는 걸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이다. 감투를 좋아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나아갈 힘이 생긴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따라' 이 먼 땅에 왔다는 것을 초반엔 실감하지 못했다. 마치 돌아갈 비행기 티켓이 있는 여행인 양 쫄래쫄래 와버렸달까.


소속감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제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그냥 여자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방인이었다. 주부는 도대체 어디 소속이지? 꽤나 이상했고 불안했다. 이러다간 내 자존감을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를 돌아보고, 내게 지금 부족한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대해 알아봤다. 나는 남편 따라 미국에 이민 온 아내다. 나의 직업은 전업주부이다. 현재 일을 하고 싶기보단 미국에서 원만하게 살 수 있도록 잘 적응하고 싶다. 비슷한 고민을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등등




인생이 드라마였다면 나는 아마도 보란 듯이 멋진 직장을 잡아 뉴욕으로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었겠지만, 앞선 이야기에도 적었다시피 남편과 합의하에 커리어 우먼보다는 주부의 삶을 선택했고, 이 가정이 나에게 최우선인 만큼 꾸준히 할 수 있고 접근성이 좋은 요리를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친정 엄마는 항상 "아 오늘은 또 뭐 먹냐, 지겹다 지겨워"라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그게 모티브가 되었고,  타깃은 매일매일 뭘 해먹을지 모르는 주부과 신혼부부들이었다. 또  스스로의 목표는 평일 주 5회 업로드와 레시피 공였다.


처음엔 정말 자취생이 밥 해 먹는 수준이라 비공개로 기록했지만, 서서히 '나는 요리 계정입니다'라고 느껴질 때쯤 미국 및 해외에 거주하는 주부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주부들이 많았고 더 나아가 유튜브 채널이 있거나 인플루언서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꾸준히 성장한 요리 실력 덕에 내 계정도 2년간 팔로워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커다란 인적 네트워크가 생겼다. 따로 만나 같이 밥도 해 먹으며 친구가 되는 경험을 하다 보니 이제 미국 어디에 살던 새로이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고, 간간히 협찬 문의도 들어와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최근, 남편에게 내가 수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재주가 없으니까 못하는 거지 요즘은 sns 안 하면 안 되는 세상이야. 뭐가 터질지 모르니 다양하게 해봐 내가 지원해줄게."


"고마워. 내가 10년 뒤엔 자기보다 돈 더 벌지도 몰라 그땐 내가 용돈도 줄게."


짤막한 대화였지만, 이번 브런치 작가를 포함해서 여러가지 도전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에 감사했고 나의 작은 성공을 응원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든든다. 어쩌면 남편 따라 이민 온 아내가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남편의 따스한 말 한마디 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느 곳에서 인연을 만나게 될지 혹은 어느 곳에서 새로운 나의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 모를 일이기에 사소한 것이라도 뭐든 꾸준히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전업 주부라고 스스로를 작게 평가하지 않아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주부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도 나의 삶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말하는 '내'가 사라진다는 흔해빠진 말로 인해 슬퍼지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딸로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서 아파트 구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