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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Feb 11. 2022

종용’s answer. 맛없는 게 하나도 없던 시절

아빠 인터뷰 6차__Q.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다나조차도 누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밤이 새도록 늘어놓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세상은 넓고 음식은 많은데, ‘가장이라고 제한을 두다니특히어린 시절 먹은 것들의 90% 이상은 맛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마련이었다학교 가기 전에학교 가면서학교에서학교 갔다 오다가학교 갔다 와서 먹은 것들은 얼마나 달콤하고 든든했던가!     

    




Q. 아빠아빠가 어릴 적에 가장 좋아한 음식은 뭐예요?    

 




나 김종용은 초‧중‧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는 음식이 계속 변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나 김종용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지만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다. 우리집에서는 거의 보리밥에 나물 종류나 어머니가 시장에 가서 사 오신 생선을 주로 먹었다. 그러나 가끔은 집에서 키우던 닭이나 오리, 그 밖의 동물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손자라곤 나밖에 없어서 모든 집안 어른들이 나에게 고기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채소를 좋아해서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아서 고기 대용으로 두부를 고기처럼 만들어서 주기도 했단다. 그 대신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개떡은 좋아해서 늘 개떡을 입에 물고 살았단다. 실제로 지금도 육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동생 익룡이는 나하고는 별개로 육식을 아주 좋아했다. 내가 6학년 때 쯤에는 집에서 닭을 잡는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러 가기를 좋아하는 익룡이가 놀러도 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닭고기 절반 정도를 혼자 먹어치웠다. 육식주의자처럼. 그래도 난 나물 종류를 좋아했기 때문에 익룡이가 육식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싸움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익룡이가 서울로 가고 나서는 육식은 거의 일하시는 일꾼들 차지가 되었다.   


   



내 할머님은 명절 때마다 집에서 한과를 만드셨다. 한 가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며칠을 두고 만드셨다. 그때 옆에 앉아서 얻어먹었던 한과는 너무나 맛있었다. 이제는 그 맛과 같은 한과가 없다는 게 섭섭할 정도다. 


하지만 할머님은 일반 음식을 만들 때는 전혀 손을 대지 않으셨다. 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다 하셨다. 우리 어머님 요리 실력은 내가 다 안다. 너무나 좋으셨다. 나물 무침을 잘한다고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셨다는 말도 들었다. 나물 무침만이 아니라 어떠한 요리에도 실력이 있으셨다.      





중학교 시절에는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늘 새참과 점심을 내가야 했다. 어머님은 일을 하시다가도 새참 시간 이전에 집에 돌아와 새참을 만들어서 내가곤 했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라 새참도 간식이 아니라 밥과 고기반찬, 나물과 막걸리를 만들어서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집에는 고기며 생선 같은 것이 안 보였다. 그것들이 어디서 나와서 새참이 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고기나 생선을 된장독이나 소금통 속에 보관해 놓으셨던 거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까. ‘내 어머님이 저렇게 지혜롭고 대단하신 분이구나!’하고 감탄한 후부터는, 어머님이 새참을 만들 때마다 옆에서 열심히 도와드렸다.      





학교에 가기 전에 맛나게 먹고 간 음식도 생각난다.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밥이 다 되기 바로 전에 만드는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을 걸쭉하게 만들어 가마솥 밥 위에 2-3cm 두께로 올려  놓고 불을 약간 지피면 밀가루 개떡이 된다. 그걸 학교 가기 전에 솥에서 꺼내 준다. 얼마나 맛나게 묵었는지 모른다. 배곯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어머님께 고마웠다.      





그 시절에는 뭘 너무 먹어서 물린다든가 하는 일이 없었다. 늘 배고픔의 연속이었으니까.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시절에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때 용돈은 100원을 받으면 최고였다. 초등학교 때에는 오다마(큰 구슬) 사탕, 삼양라면을 사먹었다. 오다마 사탕은 ‘섭은다리’ 가게에서 사서 입에 넣고 걸어오면 우리 마을 정자 앞까지 입에 물고 올 수 있다. 처음 입에 넣을 때는 입이 찢어질 정도였다가, 점점 작아져서 마을 정자까지 오면 나머지를 다 묵고 집으로 들어갔다. 라면은 그냥 씹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났는지 모른다.      





중학교 때도 별거 없다. 오다마 사탕, 삼양라면이다. 그리고 학교 소사(관리인)가 거처하는 곳에 가면 앙꼬빵과 과자 몇 개를 차려놓고는 장사를 했다. 고작 고런 것들을 사 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전거 타고 등하교 하면서 벤또(도시락)를 2개씩 싸가지고 다닐 적도 있었다. 점심에 하나 먹고, 하교할 때에 너무 배가 고파서 하나 먹었다. 간식 사먹을 돈이 없으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2학년 때부터는 버스터미널에서 여자 차장한테 고구마튀김도 얻어먹고 빵집에 가서 빵도 사 먹었는데, 순번제로 서로 돌아가며 사주고 얻어먹고 했다.     





뭘 못 먹어서 섭섭한 적은 없었다. 돈이 없었지만 도적질이라는 건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장난으로 우리 마을 애들이랑 다른 마을에 가서 닭서리 해 온 일은 있었다. 그 동네 아이들도 우리 동네에 와서 닭서리를 해가곤 했다.      


이상 끝          



종용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나는 종용이 소고기와 돼지고기닭고기와 오리고기를 외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종용은 나를 맨날 빵녀라고 놀리면서도 내가 같이 빵 먹자고 하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종용은 과자를 왜 먹나?”라고 핀잔을 주면서 맛동산 한 봉지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사람이기도 하다나는 그런 종용을 보면서 내가 보지 못한 어린 종용을 상상한다개구쟁이 표정을 하고서 증조할머니가 만든 한과와 할머니가 만든 밀가루 개떡을 두 손에 쥐고 먹는 행복한 종용을.  

                  




☎ Behind     


증조할머니가 한과를 집에서 만드셨다는 거죠?

그렇지. 내가 옆에서 봤으니까.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찹쌀을 쪄가지고 반죽을 해.

찐 찹쌀을 짓이겨서 찹쌀떡처럼 만들어.

그 다음에 만들고 싶은 모양으로 자르던지, 손으로 딱딱 빚어.

어떤 모양으로 만들었는데요? 손가락 모양?

아니, 차례 때 쓸 넓적한 거 한 열 개쯤 하고,

나머지는 꽈배기처럼 꼬거나, 하트 모양을 만들거나. 

그럼 모양이 그대로 나와요?

그걸 튀기면 그 모양의 딱 두 배 정도 커져. 

생각한 모양이 딱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오는 건 내가 먹는 거야.

먹다가 혓바닥도 디고.

기름에 튀긴 거예요?

아니, 할머니가 만드는 것은 식용유가 아니라 엿물.

엿을 달이면 물처럼 되잖아. 거기다가 튀기는 거야.

그럼 엿물에 튀기고 끝이었어요?

아니, 쌀 튀밥을 작은 절구로 갈아서 딱 묻혀. 

색깔은요?

빨간 색깔을 입힐 때는 당근 즙을 내어 가지고. 그 뭐냐.

당근 즙을 반죽에 넣는다는 거죠?

아, 그래, 그래. 

되게 여러 가지로 많이 만드셨나보다.

설에는 많이 만들었지. 

다른 집도 다 만들어 먹었어요?

조금 산다는 집들은 만들어 먹었지.


약과도 만들었어요? 

그렇지 느그 할머니가 약과도 만들고, 약밥도 만들고, 떡도 만들고.

가래떡도 집에서 만들었어. 손으로. 

가래떡을 손으로 어떻게 만들어요?

손으로 딱딱 잡아서 뽑아내.

근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턴가 밖에서 뽑아 오시더라고.  

방앗간에 기계가 들어 온 거지.

증조할머니도 할머니도 정말 어지간히 바빴겠어요.

그렇지. 설 닥쳐오면 한 열흘 전부터는 일도 못하고 설 준비만 했으니까.

마을사람들 나눠주느라 그랬다는 거죠?

옛날엔 우리 집이 손님으로 꽉 찼었다니까. 

그것뿐이냐. 느그 할머니는 쪼끄만 한 상에다가 설음식을 차려서

상보로 덮은 다음에 머리에 이고서 각 집을 돌아다녔어.

예?

어르신들 계시는 집에 가서 세배를 드리고, 

상을 내려서 드시라고 하고,

그 후엔 그쪽 집에서 장만한 음식을 올려서

다시 이고 와서 느그 증조할머니한테 세배하고.

그러면 우리 집에서 또 가고, 또 오고, 다시 또 가고, 다시 또 오고.

하루 죙일 그랬지. 설날에 세배만 한 거야.

어르신들 계시는 집에 가서 건강하시라고.  

너무 힘들게 산 거 아닌가요?

재밌게 산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힘들게 산거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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