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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an 28. 2022

종용’s answer. 6070 그들의 학교 오가는 법

아빠 인터뷰 5차__Q. 유년 시절 등하굣길을 묘사해 주세요.



중학교 1학년 겨울밤이었다친구 한 명과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눈이 와서 버스가 운행을 멈췄다집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걷기로 했다귀가 시려서 목도리를 머리에 둘렀다. 30분 정도 걸었을까별안간 하늘에서 ’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우리는 처량한 표정을 지은 채지그재그를 그리며 떨어지는 불꽃을 구경했다그것이 조명탄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등하굣길이 짧지 않을 땐 필연적으로 어떤 얘깃거리가 생긴다거리는 곧 시간이 되고시간은 혼자 흐르지 않으니까나는 종용의 등하굣길이 여간 길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Q. 아빠아빠 어린 시절에 등하굣길은 어땠어요?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늘 걸어서 다녔다. 걷는 것과 책보에 책을 싸서 다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책임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4학년 때는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연화마을에 신광북국민학교가 생겼다. 너무나 가깝고 좋은 곳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내 작은아버지와 함께 같은 다녔다. 작은아버지는 나보다 1살이 위였고 삼촌이라고 불렀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는 늘 어린이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무송마을 옆 동네인 청계동에서는 한 학년인 형제가 함께 학교에 다녔다. 이 아이들은 늘 자기들이 우리를 이긴다고 싸움을 걸어왔다. 학교가 끝나면 늘 새뜸고개 꼭대기에서 만나 2대 2로 싸움을 시작한다. 


그쪽 형 되는 놈과 우리 삼촌이 먼저 싸우면 나중에 내가 그쪽 동생과 싸웠다. 늘 우리가 이기고 청계동 사는 두 친구는 코피 나고 울고 간다. 다음날 싸움 한 번 더 하자고 하면서도 매일 지고 가는 두 형제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신광북국민학교에는 함정리 4개 마을(구봉, 연화, 무송, 청계)과 영광군 남면 송림마을, 불갑면 우곡마을 아이들을 합쳐서 4학년이 약 110명 정도였다. 우리 무송마을 아이들은 늘 마을 뒤 저수지를 돌아서, 청계마을 아이들은 새뜸고개를 넘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다니는 길이 달랐는데도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 신생 학교여서 ‘니가 세니, 내가 세니.’ 겨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학년에 올라가면서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무송마을에 자취하며 아침에 함께 등교하면서 싸움은 잦아들었다.   



   


우리는 신생 국민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러니 맨날 작업 또 작업, 일밖에 안 했다.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이 교장 선생님은 ‘칸나’라는 꽃을 너무나 좋아했다. 학교 전체와 마을 입구까지 칸나를 심기 시작하여 매일 칸나만 관리했다. 산에 가서 퇴비를 준비해 와서 칸나 심을 때 함께 넣어주고 심었다. 지금도 칸나 심는 법과 겨울 보관법은 빠삭하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놀지 않았다. 일만 시키니까. 하굣길엔 늘 저수지 둑에서 모여서 놀다가 헤어졌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등하교를 꼭 함께했다. 한 명이라도 안 나오면 꼭 찾아서 함께 했고, 아픈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께 대신 말을 해주었다. 한 번씩 땡땡이를 칠 때는 조를 짜서 놀기도 하고, 발각돼서 선생님께 기합을 받고 맞기도 했다.     





그때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왔다. 저학년생들은 눈길을 헤치고 갈 수가 없어서 큰아이들이 먼저 길을 내고 저학년이 따라왔다. 그래도 울며 못 가겠다는 동생들을 업고서 등교하곤 했다. 


하굣길에는 어디서 났는지 비료포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24번 국도 ‘욋등’이라는 곳으로 달려가 비료포대로 썰매타기하며 저녁까지 놀다가 집에 가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곤 했다. 옷은 더럽혀졌지 신발은 축축해졌지 어느 부모가 가만히 놔두겠는가.     





함평신광중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때는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차량 길은 먼지가 너무 심하고 오래 걸려서 늘 길이 아닌 물길, 도랑길을 따라 등하교했다. 이때도 ‘좌야’나 ‘섭은다리’ 아이들과 늘 싸움을 벌이고 해결은 선배들이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할머니가 자전거를 사주셔서 자전거로 통학했다. 자전거로 다닐 때는 동창생이건 후배건 늦은 놈은 무조건 태웠다. 자전거 하나에 4명까지 태우고 다녔다. 등굣길은 전부 내려가는 길이라 괜찮았지만, 하굣길은 전부 오름길만 있어서 겁나게 힘들게 타거나 자전거를 끌고 집에까지 오곤 했다.     


 



할머니는 일명 ‘짐빠리’라고 하는 짐 싣는 자전거를 사주셨다. 보통 사람이 타는 자전거가 아니어서 아주 힘들게 타고 다녔다. ‘빵꾸’가 나도 자전거포에 끌고 가서 때울 수 있는 자전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아예 빵꾸를 때울 수 있는 연장을 가지고 다녔다. 


허름한 가방을 하나 구해서 연장을 전부 넣고 자전거 뒤에 싣고 다녀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 관계로 자전거 고장 수리도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친구나 후배들이 등교할 때 빵꾸가 나서 쩔쩔매고 있으면 내가 거의 해결해 줬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나는 무서움을 잘 타지 않아서 한 번씩 욋등에 숨어 있다가 학생들을 놀려주곤 했다. 욋등은 묘소가 많아서 해가 넘어가면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곳이다. 어른들이 술 자시고 오시다가 거기서 귀신과 조우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학생 때는 체육복이 하얀색이었다. 내가 욋등에서 하얀색 체육복을 입고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귀신 소리를 크게 내면, 아이들은 가지 못하고 울던가, 주저앉아버리던가 했다. 그때는 통쾌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좀 미안하기도 하다. 그것 또한 세 번 만에 발각되어 선배들에게 얻어터졌고, 어머니가 알고 나서는 빗자루 몽둥이로 얻어터졌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함평농고에 입학했다. 계속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다가, 2학년 되면서 버스로 등하교를 시작했다. 옆집 형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하교하고 막차를 타면 가까운 욋등에서 내려주지 않고 저 먼 연화동에서 내려줬다. 


옆집 형님은 내가 없으면 연화동에서 무송으로 오는 산길을 넘지 못했다. 같이 올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트로트를 한 구절씩 부르면서 넘어왔다. 그때, 내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조용히 소나무 뒤로 숨어버리면, 옆집 형님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 했다. 참으로 재미가 쏠쏠했다.      





버스로 등하교할 적 일이다. 그때는 차장이 있었다. 남자 차장은 보통 ‘아저씨’라고 호칭하고, 좀 젊은 사람한테는 ‘성’, ‘형님’이라고 불렀다. 남자 차장들은 여지없이 차비를 받아냈다. 그러나 여자 차장은 달랐다. 여자 차장에게는 ‘누님’이라고만 잘 불러주면 차비를 내지 않고 함평에서 연화마을까지 올 수 있었다.      





누님께 예쁘다고 하면 용돈을 주기도 했다. 함평 버스터미널에서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고구마튀김을 팔았다. 이때 여자 차장을 만나면 고구마튀김을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여름에는 우리가 학교 실습 때 참외, 토마토, 수박, 오이, 가지 같은 것을 얻어다 주고 ‘윈윈’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여자 차장 누님들은 다들 어디서 사실까. 어디서라도 한번 만나고 싶다. 차장 누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상 등하교 시절 끝.



       


종용이 60-70년대에 등하교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지금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지만내가 없던 시대에도 살았던 화석 같은(?) 사람들그들의 세계에는 치고받아도 경찰서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고학교를 제 입맛대로 꾸미기 위해 칸나를 심게 하는 교장도 있고예쁘다는 칭찬에 차비를 탕감해주는 여자 차장도 있다나는 오늘도묻지 않으면 절대로 몰랐을 그들의 세계 속을 조금 헤엄쳐 본다


                  



☎ Behind     


아빠는 싸우다가 맞고 코피 터진 적 없어요?

나는 코피라는 걸 안 나보고 살았어. 아, 딱 한 번 코피 났는데, 군대 가서 싸움하다가 난 거라 어릴 때는 아니지. 

어떻게 다른 애들 코피는 터뜨리면서 아빠는 한 번도 안 날 수가 있어요?

안 맞은 거예요? 맞아도 안 난 거예요? 

맞았지. 어떻게 안 맞아. 근데 맞아도 안 났어.

자랑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랬어.    

   

증조할머니는 왜 짐 싣는 자전거를 사주셨대요? 

짐 싣는 자전거가 신사용 자전거보다 비싸.

옛날 도로는 도로라고 해도 자갈이 쫙 깔려 있었거든.

신사용 자전거는 그런 길 다니면 빵꾸가 잘나.

짐 싣는 자전거는 빵꾸가 잘 안 나고.

대신에 짐 싣는 자전거는

높낮이가 있는 곳을 지나가면 아주 몸이 부서져 버려. 

높낮이요? 과속방지턱 같은?

응.

안장에 쿠션이 없다는 얘기구나.

어, 그래, 그래. 

그래도 고장이 잘 안 나고, 넘어지면 잘 안 다쳐서

힘센 사람들은 그거 몰고 다녔어.      


아빠는 지금도 밤길이 안 무서워요?

나는 지금도 밤길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유가 뭐예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가스활명수 사러 밤길 왔다 갔다 했잖아.

빗자루 몽당이 귀신이 없다는 걸 빨리 터득한 것 같아. 내가.

숲에서 소리 나는 건 다 동물들의 소리다. 이거야.

귀신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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