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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an 22. 2022

종용’s answer. 우리가 다시 그날을 이야기한다면

아빠 인터뷰 4차__Q. 형제, 남매를 소개해 주세요.



나(김맏딸)에게는 남동생이 한명 있다그건어린 시절의 기쁨과 슬픔을 넓고 깊게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는 뜻이어서그가 존재만으로도 소중해진다는 의미다그렇다면형이나 누나오빠나 언니 그리고 동생까지 수두룩한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부모님까지 얽히고설킨 그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마 끊임없이 그 모양을 바꿔댈 것이다.


          





Q. 아빠고모랑 삼촌들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 형제는 5남 3녀이다. 그 중 우리 어머니가 낳은 아들과 딸은 4남 2녀이고, 배다른 동생 두 명이 있다. 작은 어머니의 자식인데, 우리 어머니 앞으로 호적이 되어있다. 또한 한 형제는 아니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온 누님도 한 분 계신다. 막내 고모님 따님이시다. 어렸을 적에는 한 형제인 줄 알고 살아왔다.      


  



우리 큰 누님은 다른 집 맏딸들과는 달라서 공부한답시고 집안일 같은 건 거의 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이쁜 맏딸이라 모든 걸 자기 멋대로 해도 부모님들이 아무 말을 않으셨다. 나하고는 말 한마디도 잘 하지 않았고, 나에게 한글 한 번 가르쳐 준 적도 없다. 아주 고약한 누님이셨다. 지금도 고약하지만, 예전에는 사납다고 해야 하나. 우리 어머님이 아무 말도 못 했을 정도였다.    





누님은 중학교 시절에는 함평읍, 고등학교 시절에는 광주에서 자취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에 가면서는 아예 만날 수도 없는 멋쟁이 누님이 됐다. 결국, 뭘 좋아하는지 뭘 잘 묵는지도 모르는 아이러니한 내 누님이다. 나하고는 아주 좋지 않은 관계가 계속 됐는데,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 바로 밑으로는 익룡이가 있다. 세 살 차이가 나는 익룡이와는 함께 산 기간이 짧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함께 살면서 나는 익룡이를 많이 때렸다. 익룡이가 고집이 세서 늘 나하고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말싸움에는 내가 지기 때문에 완력을 이용했던 것 같다.      





그래도 먹을 걸 가지고는 서로 싸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어머니가 해주신 나물 반찬이 좋았고, 익룡이는 육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닭을 잡은 날이면 내가 한 점을 먹는 동안에 나머지를 익룡이가 다 묵어 버렸다. 그래도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밑으로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권용이가 있다. 그런데 권용이는 젖먹이일 때부터 몸집이 컸다. 어머니한테 젖 먹이러 언덕꿀밭에 갈 때, 나는 작고 권용이는 커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권용이 머리가 너무 커서 땅에 닿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권용이가 밉기까지 했다. 편도 3km를 업고 가서 어머니 젖을 실컷 먹여서 다시 돌아오면 왕복 6km. 그런데, 다시 배가 고프다고 운다. 또 갈려고 포대기를 살펴보면 응가를 해놓고서 울고 있다. 그걸 치우고 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권용이를 재워놓고서는 나도 모르게 옆에서 자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권용이도 초등학교 졸업 후에 집을 나갔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빵 기술을 배워서 한때는 잘나가는 빵 회사에 근무했을 정도였지만, 학업이 짧고 자격증이 없어서 지금은 병원신세만 지고 있다. 이건 순전히 잘 가르치지 못한 부모님들 탓이기도 하다.     


  



내 여동생 희정이는 아주 착했으며 늘 말 잘 듣는 동생이었다. 희정이가 초등학생 시절에 내가군대에 가 버렸기 때문에 깊은 추억은 없다. 막내 진웅이는 아주 어려서 내가 군대 갔다가 첫 휴가를 나오니 희정이 뒤에 숨어서 저 아저씨 누구냐고 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 형제들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함께 살았다. 그러니 친하게 지내고 말고가 없었다. 그래도 제일 친하게 지냈던 형제는 익룡이였다. 늘 함께 했고, 같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미안한 감정을 가진 동생은 익룡이와 권용이다. 아마 동생들도 나에게 맞았던 기억이 많이 날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렇게 두 동생을 때리고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정말 진짜로 기회가 오면 내 잘못을 사과하고 싶다. 동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한 번씩 되새겨본다.          





동생들을 때리고 괴롭혔다는 종용의 고백을 듣고 나서나는 화들짝 놀랐다나도 동생을 흠씬 두들겨 팬 적이 있기 때문이다동생이 내 앞에서 징징 울었던 장면도 기억난다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는 둥 떠벌린 건 다 있어 보이려고 한 말들이다나도 언젠가는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른다사과를 하고 나서 놀려먹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그러니 종용에게도 사과의 날이 오길우리 모두 마음 한편에 켕기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그 날이 오길.            



☎ Behind     

이름이 왜 언덕꿀밭이에요? 꿀?

언덕골인데, 어른들이 언덕꿀이라고 불렀어.

거기가 어딘데 3km나 떨어져있었어요?

원래는 1키로 반 정도 가면 되는데,

하도 힘드니까 3키로 되는 거 같아가지고 그렇게 썼지.

과장하셨군요? 글에다가.

뭐 어쨌든. 24번국도 넘어서 산 밑에 있었어.

거기도 우리 밭이 있었어요?

그땐 있었지. 지금은 없어졌지만.

뭘 재배하던 곳인데요?

주로 했던 건 고구마.

아기 업고 다니는 게 정말 힘들었겠어요.

아빠도 기껏해야 일곱, 여덟 살이었을 텐데.

그렇지. 권용이가 머리가 크잖아.

애가 곯아떨어지니까 머리가 땅에 닿는 거야.

땅을 탁탁탁탁 치고 갔다니까.

근데 나는 업고 있으니까 뒤를 못 보잖아.

아주머니들이 그걸 보고 다시 업혀주고. 그랬지.

헉, 땅을 탁탁탁탁 쳤다고요?

아니, 그렇다고 다치거나 피가난건 아니고.     

과연...



언제든 전화로 카톡으로 사과할 수 있는 세상인데,

왜 아직 작은아버지랑 삼촌께 어릴 때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못하셨어요?

그건 그러니까. 그 휴대폰이나 전화로 할 수도 있겠지만,

적당한 때에 같이 앉아서 소주나 한 잔 마시면서, 

옛날 얘기 하면서 그렇게 사과 하고 싶지.

옛날에 네가 나한테 맞았던 일은 이러이러 이런 점에서 그랬다. 하고.

그런 날이 자연스럽게 올까요? 

그냥 난데없이 말해보세요. 미안하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짜샤.

스마트폰이든 뭐든 진심으로 얘기하면 다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 너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닌데, 

너랑 나랑은 방법이 다른 거야.

그냥, 그런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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