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26차__Q. 사진 한 장을 골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어린 시절 사진이 꽤 많은 편이다. 3X5사이즈 꽉 찬 앨범으로 5-6개쯤 된다. 종용과 영숙이 번갈아 가며 열심히 찍어준 덕분일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만 해도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들이는 공이 어마어마했다.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끼워서,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누르고, 레버를 돌리고, 필름을 감아서 꺼내고, 사진관에 맡기고, 필름을 받아서 고르고, 현상하고 인화하고. 그런 두 분의 고생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사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절의 추억까지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다.
Q. 아빠, 이 사진 도대체 어디서 찍으신 거예요?
진해에는 물이 내려오는 산골짜기가 없다. 산에 계곡이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쉬웠다. 물론, 산이 없는 건 아니다. 진해에는 천자봉이라는 유명한 봉우리가 있다. 해병대가 주둔하면서 훈련병들이 고지 점령 훈련장으로 많이들 이용했던 봉우리다. 이 천자봉에는 물이 아주 조금씩 흘러 내려오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직접 파이프를 연결해서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낙차를 만들어 놓았다. 여름이면 천자봉 등정 훈련 후에 등목을 하는 용도로 그곳을 애용하곤 했다.
84년 여름, 일요일이었는데 집에만 있기가 너무나 재미가 없어서 황 여사에게 계곡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해영이를 목말 태우고 걸어서 이동에서부터 천자봉 입구까지 가서 다시금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그마한 산속에 조그마한 개울이었지만 나는 아주 유용하게 이용했던 장소이다 보니까, 내 가족을 데리고 거기까지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가 파이프로 만들어놓은 물가에 도착해서 해영이가 물에 발을 담가보고 앉아서 놀기도 하면서 가지고 간 김밥을 맛나게 먹었다. 내 딸 해영이는 걷지도 못하고 아주 조그마했지만 물을 좋아해서인지 금방 그곳에 동화됐었다. 그 얕은 물에도 좋아해 주었던 내 딸과 우리 황 여사는 지금 그 자리에 간다고 하면 좋아할까.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겠지. 사진을 보니까 그 일이 지금에서야 생각이 난다. 그게 참 행복이었는데 다시 오지 않겠지.
1984년 가을, 위영이 아빠 ‘신도호’하고 함께 딸들을 데리고 장복산에 올라갔었다. 장복산은 진해 경화동에서 얼마 걸리지 않았고, 아이들을 데리고도 오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위영이 아빠하고 딸들을 목말 태우고 많이도 올라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잘도 나건만, 이제는 우리 나이가 65줄이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픈 세월이구나.
그때 나는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서 신병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해영이도 위영이도 돌을 막 넘긴 상태였다. 해영이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겠지만, 난 아비로써 그 시절이 가끔 생각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더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추억으로만 먹고산다는 선배들의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진해시 이동에 살 때의 일이다. 이동은 나의 할머님과 어머님이 한 번씩 다녀가신 곳이다. 해영이가 보고 싶다고 오신 것이다. 한번은 신병훈련소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이동 뒤에 있는 덕산동 사격장까지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한 적이 있었다. 이동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때 나의 할머니가 2층에서 내려다보고 계시기에, 더욱더 큰소리로 병력을 인솔해 갔던 생각도 난다.
지금도 그 추억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나의 할머니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신 지 오래다. 우리 어머님은 살아계시긴 해도 오래전부터 치매라는 병을 앓고 계시다. 그 옛날, 진해에 와서 손녀를 업고 얼마나 좋아라 하셨는데, 지금은 지상에 살고 계셔도 이미 별나라 딴 세상에 계신 기분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뵙고 나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뵙고서 하루 이틀 정도는 기분이 아주 다운이 되어서 마음이 괴롭다.
한편으로 제일 행복했던 기억은 자전거를 탔던 일 같다. 당시에 퇴근하고 나면, 늘 자전거에 해영이를 태우고 경화동과 이동을 한 바퀴 도는 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오면 또 놀자고 떼를 써서 한 번 더 자전거로 하이킹을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했다. 자전거 핸들 안쪽에 아이들 자리가 있어서 아주 편안히 하이킹하는 게 가능했다.
그때 그 시절 참 행복했는데, 지금은 이 나이 묵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생살이가 하나도 재미가 없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시간, 창밖에는 비가 내리네. 좋은 일요일 오후 되고. 행복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행복이 생긴다고 말하고 싶다.
이상 끝.
기억력이 남보다 좋지 않은 편이라, 어린 시절 사진이 남보다 많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종종 오래된 앨범을 들춰보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사진은 기억을 불러내고, 기억은 기분이나 분위기까지 몰고 온다. 그러면, 나와 그 시절이 연결되고, 나와 종용이 연결되고,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행복인지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너무 거창했나? 뭐, 그러면 좀 어때. 사진은 생각보다 큰 힘을 갖고 있고, 나는 ‘0’이 되어 사라질 뻔한 기억들을 종용 덕분에 되살려 놓을 수 있었다.
2022년 8월 이후로 종용은 더는 회신을 보내오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그의 군 생활이나 섬 생활, 도둑맞거나 잃어버린 물건들, 자녀를 키운 기쁨이나 슬픔 등을 물었지만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그 어떤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종용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었거나, 이미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거나, 또는 더는 할 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딸내미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 시작한 비자발적 프로젝트가 새삼 의미 없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혹은 인터뷰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것이 그와 나의 일생일대 과업 같은 건 아니었기에, 나는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종용이 행복한 날들을 만들기만 하면 그걸로 그만인걸.
일로서의 인터뷰는 깊이가 중요하지만, 딸로서의 인터뷰는 너비가 중요했다. 나는 스물다섯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으나, 과거와 현재의 종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어린 시절 학교생활은 어땠고, 자전거는 어떤 의미였고, 연날리기는 얼마나 재미있었고, 오일장에선 무얼 먹었고, 그의 장래희망은 뭐였고,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종용과 해영이 나란히 길을 걸을 때, 특별한 일 없이 전화할 때, 마주 보고 밥을 먹을 때, 서로를 대하는 마음의 거리가 손바닥 한 뼘 정도는 더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다. 인터뷰는 미완성이었지만, 인생이나 인간관계 같은 건 원래 미완성인 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거니까. 우린 지금 괜찮고 앞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부녀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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