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行者), 강제로 개명당하다

스님도, 속인도 아닌 어정쩡한 청년

by 현루

이제 제 이름은 행자입니다


행자란 출가 하여 아직 계(戒)를 받지 않은

예비 사미(남)나 사미니(여)를 일컫는 말입니다.

법명도 없고, 속세의 이름도 잊고, 다만 ‘성(姓)+행자’라 불리는 시기. 절집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시 거쳐야 할, 출가와 수행 사이의 다리 같은 자리입니다.

삭발식을 마치면 복장과 생활도 변합니다.

사계절 상하 고동색 행자복, 여름엔 고무신,

겨울엔 털신. 속옷조차 삼각팬티는 금물이고, 러닝셔츠도 반드시 반팔만 허용됩니다.

다닐 때 양손은 차수라 하여 손을 모아야 하고 시선은 45도. 스님들을 볼 때면 횟수에 상관없이 합장으로 인사. 자기 전까지 눕는 거 금지. 등등.

작은 규율 하나하나에도 뜻이 있고, 그 안에 스스로를 낮추는 수행이 있습니다.


김 행자



여성 이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출가 직후의 호칭일 뿐이었습니다.

법명도 아니고, 속가 이름도 아닌,

스님도 아닌 일반인도 아닌, 그 어정쩡한 위치의 남자. 속세에서 뛰쳐나와 절집 문을 두드린 청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출가라고 하면 대단한 결심이나

깨달음을 떠올리지만, 저에게 출가는 그보다는 ‘절집에 정 붙이는 시간’이었습니다.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기 전까지의

시간은 매일 생활 속에서 불법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날들이었습니다.

삭발 후, 저는 ‘행자실’이라 불리는 공간으로 안내받았습니다. 그곳은 꽤 큰 절이었고,

서른 명 가까운 행자들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비롯해 나이대도,

배경도제각각이었습니다.


열여섯 살에 부모님의 합의로 들어온 소년도 있었고, IMF 이후 삶이 무너져 이곳을 피난처

삼은 40대 중년 남성도 있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이도 있었고, 외국에서 불교를 접하고 들어온 전직 가톨릭 신부, 전직 공무원, 회사원, 사업가, 백수까지 —

세상 어느 공간보다도 다채로운 이력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조계종의 출가 자격 조건은 엄격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만 50세 미만, 독신 (이혼 후 6개월 이상 지나고 친권 포기한 사람 가능), 부채 없어야 하고 문신 없고 질병 없고 고졸, 그 외에도 3가지 이상의 조건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 조건들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사는 데는 여전히 갈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 차로 인한 미묘한 기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입산한 이는 ‘행자반장’이었습니다. 일종의 통솔 역할을 하며, 행자실의 청규와 소임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처음 맡겨진 소임은 ‘채공’—즉, 반찬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칼질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속으로는 난감했지만, 그곳은 불만조차 속으로 삼켜야 하는 세계였습니다. 군대보다 더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저는 공양간으로 안내되었고, 선배 행자에게서 업무를 인수받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칼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 절에는 학인 스님들, 기도하는 스님들,

사무직 불자들까지 포함해 200여 명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하루 세끼 공양은 행자들이 전담했고, 그것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예불과 운력을 제외한 시간 대부분을 저는

칼질과 재료 손질로 보냈습니다.

함께 채공 소임을 맡은 상행자에게서 식재료

손질법, 양념 배합, 절집의 식사 원칙 등을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에 익었고, 시간이 지나자 반찬까지 책임지는 ‘정식 채공 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제 마음에도 조용한 평안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도님께서 “수고 많다”며 피자를 몇 판 사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피자는 ‘불고기 피자’였습니다.

절에서는 육류는 물론이고,

오신채(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

해산물, 시중 조미료도 모두 금기였습니다.


결국 그 피자들은 사무실 직원들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고구마 피자였으면 먹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웃어넘겼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조선간장, 재래식 된장, 소금, 들기름만으로도 얼마나 깊고도 맑은 맛이 가능한지를요.

절집의 음식은 단순했지만, 거기에는 자연의 시간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기, 술, 담배에 대한 미련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나물 하나, 김치 한 조각도 신기할 만큼 풍성한 맛이 있었고, 아침마다 먹는 죽과 누룽지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습니다.

행자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모인 사람들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지만, 그 안에서도 규율은 냉정할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묵언 수행이 기본이었고, 말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눈빛, 손짓, 가끔 허용되는 메모지로만 의사소통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행자실 안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입산한 한 행자가 은근한 지적과 강압적인 태도를 반복했고, 처음엔 참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청소하는데 어이없는 지적을 하며 손끝으로 저를 가리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무언가 끓었습니다.


그만 좀 하시죠…”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말. 언성이 오갔고,

마침내 주먹까지 오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절집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사과와 절(拜)로 상황은 수습되었지만, 제 마음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던 출가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고요한 묵언도, 인간관계 속의 위계와 권위도

저를 지치게 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짐을 꾸려 절길을 내려왔습니다.

절을 떠나는 길, 제 안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출가했나… 좀만 더 참을걸…”
후회와 안도, 실망과 희망이 뒤섞인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출가란 단 한 번으로 완성되는 길이 아니라는 것. 사미계를 받기 전까지는 다른 절에서도 행자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도요.

그래서 저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충청도의 한 큰 절. 이번엔 행자가 다섯 명뿐인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절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웠고, 무엇보다 제 마음이 훨씬 평온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행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날라리 출가하다”라는 이 연재는 단순한 절집 체험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내면과의 싸움이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 권위와 수행 사이의 줄타기 속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다음 화부터는 절집 안 행자들의 좌충우돌, 그리고 깨달음보다 더 깊은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