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시절

불쑥, 삶이 내게 물었습니다

by 현루

그 시절, 저는 정말 잘 놀았습니다.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제대로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강남 한복판, 신사역과 압구정역 사이, 8 학군이라 불리던 동네에서 저는 늘 중심에 있었습니다.

골목은 조용했지만, 저는 그 조용함을 깨는

소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나이키 신발, 아디다스 트랙탑, 손목엔 반짝이는 전자시계, 무스로 세운 앞머리까지. 유행의 첨단을 달리던 저였습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며

“오늘도 완벽하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강남은 지금처럼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전에도 아파트는 있었지만 1980년대

부터 많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골목엔 낮은 단독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저희 집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층짜리 단독주택, 마당엔 작은 수영장과 정원, 대문 옆엔 주차장이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제 무대였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하던 해,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습니다.

그건 제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백화점에서 사 온 메이커 옷, 새로 나온 메이커 신발, 그리고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타일링.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오늘은 뭘 입을까? 지난번에 입었던 재킷? 아니면 새로 산 셔츠?”

백화점에서 옷 한 벌 사고 나면 주머니엔

동전 몇 개만 굴러다녔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거리로 나가면 친구들, 후배들, 심지어

모르는 이들까지 고개를 돌려봤습니다.
“야, 쟤 오늘 또 멋지다.”
이런 말 한마디면 그날은 성공이었습니다.

거울 속 제 모습, 거리에서 받는 시선,

그 모든 게 저를 채웠습니다.


명동, 이태원, 종로, 강남역, 영동시장,

말죽거리. 당시엔 고등학생이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 호프집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고고장의 쿵쿵대는 베이스.

그 모든 게 제 놀이터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죽돌이’로 통했습니다.

춤을 추는 게 제일 좋았습니다.

음악이 흐르면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제 몸짓은 종종 시선을 휘어잡았고, 그러면 또 다음 날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야, 어제 쟤 춤추는 거 봤어? 정말 멋졌지.”
친구들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누군가는 타락이라 했고, 누군가는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그냥, 재미있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쾌락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새벽까지 거리를 헤매는 게 삶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성장하여 청년이 돼서도 이러한 삶이

지속되었는데

어느 날, 삶이 불쑥 물었습니다.


“이게 다야?”


그 질문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쌓아 올린 모든 것 ~

옷, 스타일, 시선, 친구, 여행, 파티~ 가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질문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저는 애써 외면했습니다.

“뭐, 인생이 원래 이런 거지. 즐기면 되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또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 질문이 다시 떠오른 건 몇 년 뒤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삼성동 봉은사에서 49재를 지냈습니다.

49일 동안, 매주 정해진 날이면 절에 들렀습니다. 처음엔 형식적인 일이었습니다.

가족이니까, 해야 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절에 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법당에 들어서자 향내가 코를 찔렀습니다.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법당 안은 고요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염불 소리가 낮게 울렸습니다. 스님들의 삭발한 머리, 고동색 가사, 촛불의 흔들리는 불빛.

그 모든 게 낯설고도 강렬했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처음으로 멈췄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마음은 어디에 머무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제 삶이,

그 순간부터 시시해졌습니다.

웃기게도, 너무 잘 놀아서 인생이 재미없어졌습니다.

쾌락의 끝에 다다르자,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텅 빈 공허함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던 장면.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려서, 죽음이 뭔지,

슬픔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어머니의 얼굴,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제 안의 공허함. 그 모든 게 얽히며 저를 흔들었습니다.

다시 그 질문이 속삭였습니다.
“그래서 , 뭘 하고 싶은데?


"출가" (出家)



출가라는 단어가 제 삶에 들어온 건

그때였습니다.

처음엔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절에 간다니, 말도 안 됐습니다. 강남의 날라리가 스님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끌렸습니다.

절에 갈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향 냄새, 염불 소리, 스님들의 고요한 걸음걸이.

그 모든 게 어지럽던 제 머릿속을 잠시 멈추게 했습니다.

저는 그 후 자주 봉은사에 갔습니다.

법당에 앉아 염불 소리를 듣고,

스님들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평온하게 만드는 걸까? 궁금증이 커질수록, 제 안의 공허함도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했습니다.



절로 가자. 속세를 떠나자



그 결심은 충동적이었지만,

동시에 단단했습니다.


더 이상 강남의 거리에서,

나이트클럽에서, 텅 빈 쾌락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뭔가 다른 삶, 더 깊은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저 출가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뭐? 네가 무슨 출가야?

너 같은 녀석이 절에서 버티겠어?”
아버지의 반응은 당연했습니다.

저를 아는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뒤, 제 표정을 보시더니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습니다.
“진심이면, 해봐라. 하지만 후회하지 마.”
그 허락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의 눈빛엔 걱정과 믿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자친구였습니다.


당시 둘은 20대 중후반,

결혼을 생각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지했습니다.

함께 미래를 그리며, 결혼 이야기도 슬쩍

꺼냈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출가는 그 모든 계획을 뒤흔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와 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신사역 근처, 자주 가던 호프집이었습니다.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맥주잔을 앞에 두고 서툴게 말을 꺼냈습니다.


나, 출가하려고 해.”


그녀는 출가의 의미를 결혼이라 생각했기에

"우리 결혼하는 거야?

언제? 프러포즈는 해야지?" 하며 해맑게

웃고 있었고 차마 말을 못 하다 술기운을

빌려 제가 원하는 출가에 대해 설명을 했고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고 천천히 마셨습니다.

저는 그녀의 눈을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끝내 그녀는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빠 답네요.”


그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실망, 체념,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이해가 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더 아팠습니다.

그녀가 화를 냈더라면, 울었더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게 더 아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습니다.


“행복해야 해. 안녕 잘 가.”


그 말은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며칠 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라도행 버스를 탔습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강남의 네온사인,

익숙한 거리,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습니다.

마음은 시원하고도 무거웠습니다.

도착한 절은 전라도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웅장한 대웅전, 오래된 소나무들, 그리고

상쾌한 공기. 절은 크고, 웅장했습니다.

늦은 오후에 도착했기에 , 절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잤습니다.


낡은 형광등 아래, 좁은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내가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일찍 절에 도착했습니다.

매표소 앞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출가하러 왔습니다.”
직원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저쪽 요사채로 가시면 됩니다.

”담당 스님과 면담을 하면서 차를 마시는 도중

스님은 저를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눈빛이 깊었습니다.


“왜 출가를 하려는 겁니까?”
“삶의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시작해 봅시다.”

작은 방 하나를 배정받았습니다.

방엔 요와 베개, 그리고 천수경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예불 시간 외엔 대기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강남의 번잡한 거리에서, 항상 무언가를 하던 제가, 이렇게 고요한 공간에 갇혀 있으려니

숨이 막혔습니다.


하루 1000배. 새벽 2시 반 기상, 3시 예불,

공양(식사), 대기, 다시 예불, 다시 대기. 일주일간 그 일상을 반복했습니다.

절을 올릴 때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일주일 뒤, 원주 스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출가하겠습니까?”
“예.”
“그럼 내일 삭발식을 합시다.

오늘은 공양 후, 삼천배만 하세요.”



삼천배? 三千拜

sticker sticker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동안 했던 천배도 힘들었는데, 삼천배라니.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천배는 예고편이었습니다.


다음 날 삭발식은 전통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법당 안, 스님들과 행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저는 중앙에 앉았습니다.

참회 진언을 염송 하는 가운데 서걱서걱, 이마에서부터 머리칼이 떨어졌습니다.

길게 기르던 제 외모의 상징이 바닥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

‘이게 잘한 일일까? 후회는 없을까?’
의식의 마지막, 환복을 했습니다.

상하 고동색의 행자복과 행건,

거울 앞에 선 저는 더 이상 강남의 날라리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얼굴, 낯선 옷. 하지만 이상하게,

그 낯섦이 편안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절 생활은 시작됐습니다.


이제 진짜 이야기의 서막이 열립니다.


행자 시절
현루 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