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왕실의 부름, 설총이 나아갈 큰 세상

서라벌의 태양이 된 파계의 꽃, 만인의 스승으로 우뚝 서다

by 현루

​서라벌의 정월, 보름달이 요석궁의 지붕 기와를 은빛으로 적시던 밤이었다.

요석궁의 대문 앞에는 평소와 다른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왕실의 전령이 들고 온 붉은 칠을 한 비단 함 속에는 국왕의 친서와 함께 신라 최고의 학문적 예우를 상징하는 금박 입힌 홀(笏)이 들어 있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이제 서른을 훌쩍 넘겨 학문의 정점에 오른 설총을 '국사(國師)'의 반열에 올리고자 했다.


​"설총, 이제 너의 지혜는 한 가문의 전유물이 아니요, 요석궁의 담장 안에 가둘 수도 없다. 왕실은 네가 국학의 대두(大頭)가 되어 온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고, 통일 신라의 새로운 기강을 바로잡아 주기를 간청하노라."


​왕의 사자가 전하는 말은 천둥소리처럼 요석궁의 마당을 울렸다.

요석은 툇마루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파계승의 자식'이라 손가락질받던 아이가, 이제는 왕이 머리를 숙여 가르침을 청하는 이 나라의 가장 큰 스승이 된 것이다.

요석의 눈가에는 갓 태어난 설총을 품에 안고 세상의 조롱을 견뎌내던 날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설총은 왕의 부름 앞에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길이 권력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가 남긴 자비와 어머니가 가르친 인고를 제도화하는 가시밭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왕의 함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것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락이 아니라, 이 세상을 더 밝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공적인 서원(誓願)이었다.

​설총이 정식으로 국학의 수장이 되어 대궐로 들어가는 날, 서라벌의 거리에는 구경 나온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비단옷을 입은 고관대작들보다, 자신들의 투박한 말투를 문자로 만들어준 설총에게 더 열광했다.


​"보시오! 저분이 바로 우리의 입을 열어주신 설총 나으리오!"
"파계승의 아들이라더니, 이제는 신라의 태양이 되셨구려!"


​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설총은 신문왕 앞에 섰다.

신문왕은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통일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과 귀족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왕은 설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설총, 짐은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고 싶소. 힘으로 누르는 정치는 끝났소. 마음으로 다스리는 치국(治國)의 도리는 무엇이라 생각하오?"


​설총은 허리춤에서 붓 한 자루를 꺼내 왕의 앞에 놓았다.


"전하, 정치는 붓과 같습니다. 붓이 너무 꼿꼿하면 종이를 찢고, 너무 무르면 글자가 뭉개집니다. 지금 신라에 필요한 것은 '중용(中庸)'의 미학이며, 소외된 백성들의 목소리를 왕실의 법도와 연결하는 소통의 문장입니다. 저는 국학의 제자들에게 논어와 맹자만을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대신 아버지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부르던 그 생명의 소리를 유교의 합리적인 제도로 번역하여 가르치겠습니다."

​설총의 교육 개혁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국학의 입학 자격을 골품(骨品)에만 두지 않고, 재능 있는 지방 인재와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에게도 개방하려 애썼다.

또한 어려운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암기 위주의 공부가 아닌 '뜻'을 새기는 공부로 바꾸어 놓았다.
​"글은 지배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설총의 일갈은 보수적인 진골 학자들에게는 신성모독과 같았으나, 젊은 유생들에게는 복음과 같았다.

설총의 강당에는 매일 수백 명의 제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설총은 그들에게 문장을 가르치는 동시에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다.

그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정직한 마침표를 강조했고, 군림하는 태도보다 경청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주었다.
​이 무렵 설총은 신문왕에게 그 유명한 '화왕계(花王戒)'의 초안을 들려주게 된다. 모란꽃(왕)이 향기로운 장미(간신)에게 현혹될 때, 볼품없지만 충직한 할미꽃(충신)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그 우화는, 설총이 평생 보아온 요석궁의 꽃들과 저잣거리의 풀뿌리들을 비유로 든 통치 철학의 결정체였다.

​설총이 나아갈 '큰 세상'은 이제 서라벌이라는 좁은 성벽을 넘어 신라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이두로 된 행정 지침서를 내려보내 백성들의 수탈을 막게 했고,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나라에서 책을 빌려주는 제도를 건의했다.
​하지만 큰 빛 뒤에는 깊은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었다.

설총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를 시기하는 세력의 음모도 교묘해졌다.

"설총이 왕의 눈을 가리고 신라를 '중들의 나라'로 만들려 한다"는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설총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매달 보름이면 요석궁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차를 나누며 마음을 닦았다.


​"총아, 네가 머무는 대궐은 화려한 연못과 같으나 그 바닥에는 차가운 진흙이 가득하다. 하지만 기억해라. 진흙이 깊을수록 연꽃의 향기는 더 멀리 가는 법이란다.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아들이다. 네가 흔들리면 이 땅의 문장이 흔들린다는 것을 명심해라."


​요석의 격려는 설총에게 가장 큰 방패였다.

요석은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그 기품은 더욱 청초해졌다.

그녀는 아들이 큰 세상으로 나아간 뒤에도 여전히 요석궁의 등불을 밝히며, 아들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원효 또한 멀리서 아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홀로 춤을 췄다.

"내 아들이 드디어 자루 없는 도끼로 하늘 기둥을 제대로 깎고 있구나!"

원효는 설총이 머무는 국학의 담장 너머로 이름 모를 들꽃 씨앗들을 날려 보냈다.

부자는 직접 대화하지 않았으나, 신라의 공기 속에 흐르는 지혜의 파동으로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설총은 이제 명실상부한 신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가 나아간 큰 세상은 권력의 정상이 아니라, 진리가 현실이 되는 실천의 현장이었다.

파계의 꽃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제 신라의 대지에 거대한 숲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어느덧 서라벌의 하늘 위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총은 국학의 높은 누각에 올라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자신의 사정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있었고, 자신들을 대변해 줄 스승이 있었다.

설총은 붓을 꽉 쥐었다.

그가 열어갈 큰 세상은 이제 막 서막을 마쳤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