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이 쓰러지는 소리, 아들의 가슴에 내리는 마지막 빗줄기
신라의 가을이 다시 찾아와 서라벌 전체를 금빛으로 물들였으나, 국학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기틀을 닦던 설총의 가슴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어느 날 새벽, 요석궁에서 온 급박한 전령이 설총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전령이 건넨 소식은 짧았으나 설총의 세상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저잣거리에서 백성들과 춤추며 무애(無碍)의 진리를 설하던 아버지 원효가, 혈사(穴寺) 인근의 작은 토굴에서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아버지가... 멈추려 하시는구나."
설총은 들고 있던 붓을 놓쳤다.
검은 먹물이 흰 종이 위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 같았다.
설총은 관복을 벗어던지고 말에 올라탔다.
어머니 요석 또한 이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보내 원효의 마지막 길을 보살피고 있었다.
설총은 서라벌의 화려한 성문을 지나 거친 산길로 말을 몰았다.
찬 바람이 뺨을 스쳤으나, 설총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번도 '아버지'라 소리 높여 불러보지 못한 그 사내의 뒷모습만이 어른거렸다.
혈사 근처의 토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평화로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이름 없는 들풀들이 토굴 주변을 호위하듯 서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만이 원효의 거친 숨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토굴 안으로 들어선 설총은 앙상하게 마른 노승의 모습을 마주했다.
한때 우주를 뒤흔드는 사자후를 토해내던 그 사내는, 이제 낡은 가사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셨는가... 신라의 문장이여."
원효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아들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가을 낙엽처럼 바스락거렸으나, 그 안에는 여전히 이 세상을 다 품고도 남을 자비가 서려 있었다.
설총은 아버지의 마른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은 평생을 길바닥에서 중생의 눈물을 닦아주던 성자의 손이었다.
"아버지, 소자 왔습니다. 아직은 가시면 안 됩니다. 저에게 보여주셔야 할 길이 아직 많고, 제가 들려드려야 할 문장이 산더미 같습니다. 어찌 이리 급히 바람처럼 흩어지려 하십니까."
설총의 눈물이 원효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원효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승의 빛을 너머 저편의 진리를 보고 있는 듯 맑고 투명했다.
원효는 미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들의 얼굴을 더듬었다.
"총아, 슬퍼하지 마라. 흐르는 물이 멈추는 것은 고이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무거운 육신을 벗고, 네가 쓰는 글자 사이사이의 빈 공간으로, 네가 걷는 서라벌의 바람 속으로 스며들려 한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온 세상이 되는 것이니 어찌 슬프다 하겠느냐."
원효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가느다란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조차 그에게는 하나의 장단처럼 느껴졌다.
원효는 설총의 손을 꽉 쥐며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내가 평생을 바쳐 헐고자 했던 담장을, 너는 글로써 이었구나. 나의 파계(破戒)가 진흙이었다면, 너의 문장은 그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총아, 내가 떠난 뒤에도 절대로 문자의 화려함에 취하지 마라. 글은 사람의 마음을 담지 못하면 죽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백성이 배고플 때 '밥'이라는 글자가 따뜻하게 느껴지고, 백성이 추울 때 '옷'이라는 글자가 포근하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글을 써야 한다."
원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설총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설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이두로 머릿속에 새겼다.
원효는 이제 요석의 안부를 물었다.
"요석은... 잘 있느냐?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전하지 마라. 우리는 미안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의 도(道)를 완성해 준 도반(道伴)이었으니. 그저, 덕분에 이 세상이 참으로 따뜻했다고 전해주거라."
원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평생을 걸림 없이 살았던 무애의 성자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에게 사흘간의 사랑을 주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집착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고마움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원효의 호흡은 점점 잦아들었다. 토굴 밖에는 원효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거지와 병자, 백성들이 촛불을 켜고 나직이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이 켜든 촛불은 어두운 산자락을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원효는 밖에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듣기 좋구나... 저것이 진짜 부처의 소리다."
원효는 설총의 팔을 잡고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벽에 걸린 낡은 박 바가지를 가리켰다.
설총이 그것을 건네자 원효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화려한 법당의 종소리도, 장엄한 경전의 낭독도 없었다.
오직 아들의 흐느낌과 백성들의 나직한 노래가 원효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서기 686년, 신라의 거목 원효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산 아래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토굴 안을 한 바퀴 감싸고돌아 나갔다.
설총은 아버지의 시신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제야 당신을 목놓아 부릅니다!"
설총의 외침은 계곡을 타고 메아리쳐 서라벌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한 시대의 위대한 성자를 향한 작별 인사였으며, 아버지가 남긴 거대한 유산을 이어받겠다는 아들의 장엄한 선언이었다.
원효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서라벌은 거대한 슬픔에 잠겼다.
신문왕은 친히 조사를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수만 명의 백성이 흰 옷을 입고 그의 뒤를 따랐다. 요석은 요석궁의 문을 열고 하얀 소복 차림으로 서서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했다.
요석은 원효의 유골함을 마주하고도 울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수십 년 전 그를 보내주었을 때부터 오늘의 이별을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거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이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우주의 바다로 마음껏 유행(遊行)하십시오. 당신이 남긴 향기는 제 아들의 붓끝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와 혈사 인근에 안치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가 남긴 화쟁의 사상을 완벽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겠노라고. 아버지가 바람으로 흩어졌다면, 자신은 그 바람을 붙잡아 문자의 숲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했다.
원효의 병환과 죽음은 설총에게 거대한 상실이었으나, 동시에 그를 진정한 신라의 정신적 지주로 완성시키는 마지막 시련이었다.
거목은 쓰러졌으나, 그가 남긴 씨앗은 설총이라는 젊은 나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