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원효와 요석, 파계의 꽃

멤버십으로 가려진 1.2화

by 현루

​신라의 심장부, 서라벌의 밤은 깊어갈수록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금성(金城)의 화려한 전각들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요석궁의 담벼락 안쪽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에 잠겨 있었다.

그 적막의 한복판에 요석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가장 아끼는 딸이자, 서라벌의 모든 사내가 꿈속에서라도 한 번쯤 마주치길 갈망하는 절세의 가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비단옷의 광택 아래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 같은 고독이 짙게 눌러앉아 있었다.
​요석은 이미 한 번의 이별을 겪은 여인이었다. 남편이었던 김흠운이 백제와의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한 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청춘과부'라는 서글픈 꼬리표와 부왕이 마련해 준 요석궁이라는 이름의 창살 없는 감옥뿐이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여섯. 꽃이 가장 붉게 피어나 향기를 사방에 흩뿌려야 할 나이에, 그녀는 지는 낙엽을 보며 자신의 생(生)도 이대로 저물어갈 것이라 믿으며 매일을 견뎠다.


​“상궁, 오늘 달이 참으로 밝구나. 저 달은 성벽 너머 저잣거리의 가난한 초가집도 비추고, 이름 모를 산사의 퇴락한 기와 위에도 공평하게 내려앉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나만 이 좁은 뜰에 갇혀 달빛의 조각이나 줍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요석의 탄식에 곁을 지키던 노상궁은 대답 대신 촛불의 심지를 돋우었다.

공주의 외로움은 이 궁궐의 무거운 돌덩이들조차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요석은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그녀는 문득 이 화려한 세상이 자신에게는 단 한 조각의 진심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허상처럼 느껴졌다.

궁녀들의 영혼 없는 아첨, 귀족들의 탐욕 어린 시선, 그리고 죽은 남편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며 보내야 하는 의무적인 시간들.

요석은 그 모든 가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담장은 너무도 높았고, 왕실의 법도는 숨이 막힐 듯 견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라벌의 나른한 오후를 깨뜨리는 기이한 노랫소리가 요석궁의 높은 담장을 넘어 요석의 귀에 닿았다.

그것은 우아한 아악(雅樂)도 아니었고, 서정적인 향가도 아니었다.

거칠고 투박하며, 어딘가 나사가 풀린 듯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기묘한 울림이 있는 사내의 목청이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노랫소리는 저잣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더니 이내 왕궁 앞까지 도달했다.

요석은 자수틀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자루 없는 도끼’라니. 그것은 여인을 뜻하는 은유가 아닌가.

그리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나라를 구할 큰 인재를 말함일 터였다.

대담하다 못해 발칙하기 짝이 없는 그 가사는 서라벌의 엄격한 예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비웃고 있었다.


​“저 노래의 주인공이 대체 누구냐? 어찌 궁궐 앞에서 이리 방자한 노래를 부른단 말이냐.”


​요석의 물음에 궁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주님, 원효라는 승려라 하옵니다. 당대 최고의 고승이라 칭송받으면서도, 누더기를 걸치고 술집을 드나들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여 ‘복성거사’라고도 불린다 하옵니다. 법당에 앉아 염불을 외우기보다 저잣거리에서 거지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니, 참으로 해괴한 분이지요.”


​요석은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모든 이들이 격식을 차리고 자신을 우러러볼 때, 스스로를 시궁창에 던져버린 사내. 부처의 제자라면서 부처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내. 요석은 그 사내가 궁금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러면 자신이 갇힌 이 보이지 않는 감옥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녀는 담장 너머로 사라져 가는 그 노랫소리를 한참 동안이나 배웅했다.

​요석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원효의 노래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앞두고 신라에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필요했다.

원효와 같은 천재적인 사상가가 대를 이어 그 지혜를 발휘한다면 신라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판단했다.

왕은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속뜻을 단번에 간파했다.


​“원효가 대현(大賢)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내 딸 요석이라면 그 도끼의 자루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지.”


​왕은 즉시 근위대장에게 비밀스러운 명을 내렸다. 원효가 요석궁 근처의 문천교를 지날 때, 실수인 척 그를 물에 빠뜨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젖은 옷을 갈아입힌다는 핑계로 그를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들여보내라는 정교한 각본이었다.

왕의 명령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요석은 부왕의 부름을 받고 거처로 향하던 중, 문천교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들었다.


어이쿠! 소승이 발을 헛디뎠구려! 이를 어쩌나, 이 귀한 가사가 다 젖어버렸네!”


​익살스러운 목소리였다.

요석은 가마의 휘장을 살짝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물에 흠뻑 젖은 채, 오히려 즐거운 듯 껄껄 웃으며 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눈은 젖은 옷의 초라함과는 대조적으로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가마 속의 요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요석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남녀 간의 정욕이라기보다는, 영혼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한 통찰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원효는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왕처럼 요석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모든 가식을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원효는 요석의 안내를 받아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가사를 벗고 궁에서 내어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승복 대신 선비의 옷을 입은 그는 더 이상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사내였고, 고뇌하는 인간이었다. 요석은 차를 우려 그에게 내놓았다.

방 안에는 은은한 향나무 냄새와 뜨거운 찻김이 서렸다.
​원효는 찻잔을 받지 않고 요석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이 너무도 깊어 요석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공주여, 당신의 눈 속에 갇힌 별이 참으로 애달프구려. 어찌하여 이 넓은 세상을 두고 이 작은 궁궐을 감옥 삼아 살고 계십니까? 화려한 비단은 당신의 영혼을 덮는 수의(壽衣)가 아니오?”


​원효의 첫마디에 요석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했던, 아니 자신조차 외면했던 진실이었다.


스님께서는 담장 밖에서 춤을 추시니 자유롭다 생각하시겠지요. 저에게는 이 담장이 운명이고, 이 고독이 법도입니다. 여인으로서 왕실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원효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요석궁의 무거운 공기를 단번에 찢어놓았다.


운명이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오늘 그 운명을 깨뜨리러 왔소. 당신이 쥔 그 도끼 자루가 나를 찍어내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기둥으로 삼으려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 몸을 바치겠소. 부처를 죽여서라도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나의 참된 수행이오.”

​원효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요석에게 다가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평생을 책과 예법에 파묻혀 살았던 요석에게 그 온기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의 감각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원효의 눈 속에 담긴 거대한 자비와 고독이 그녀를 붙잡았다.
​밤이 깊어지자 요석궁 주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두 사람만이 남은 방 안에서, 원효는 촛불을 끄지 않았다.

그는 요석에게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는 듯 당당했다.


나는 오늘 부처를 버리고 당신에게 왔소. 부처는 높은 단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의 가슴속에서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오. 당신의 고독을 내가 안겠소. 그것이 나의 파계(破戒)이자 나의 구원이 될 것이오.”


​요석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내는 자신을 유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타 죽으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은 서로의 옷자락을 풀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결합을 넘어, 신라라는 견고한 신분 사회의 벽을 무너뜨리는 행위였으며, 억눌린 생명력이 분출하는 의식이었다.

그 밤, 요석궁의 달은 구름 뒤로 숨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며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했다.
​요석은 원효의 품 안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드디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 이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원효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다시 저잣거리의 광대가 될 것이고, 당신은 다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르오. 하지만 기억하시오. 우리가 나눈 이 숨결이 장차 이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 될 것임을. 우리의 사랑은 이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것이 될 것이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라벌의 역사를 바꾸고, 한 민족의 정신을 잉태할 거대한 폭풍우가 요석궁의 작은 방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요석은 비로소 자신이 갇힌 정원에서 벗어나 진정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턱을 넘었다.


​요석궁의 새벽은 서라벌의 다른 곳보다 유난히도 더디게 밝아오는 듯했다.

창호지 문틈 사이로 희뿌연 안개가 스며들고, 방 안을 채웠던 촛불이 긴 밤을 다 태우고 자취를 감출 무렵, 요석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낯설지만 포근한 사내의 체온이었다.

곁에 누운 원효는 고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이 혹여 환영은 아닐까,

그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에 요석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그의 살결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것은 실재하는 생명의 온기였다.

신라 최고의 고승이라 불리던 이가 단 하룻밤 만에 파계의 길을 택하고 자신의 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요석은 원효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수행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깊은 눈가와 굳게 다문 입술. 이 사내는 대체 어떤 거대한 진리를 보았기에, 부처라는 등불마저 뒤로하고 이 험난한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것일까.


​“공주여, 잠이 깼소?”


​원효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잠기지 않았고, 오히려 새벽 사찰의 종소리처럼 청아하게 울렸다.

요석은 움찔하며 손을 떼려 했으나, 원효가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두려워 마시오. 어젯밤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한순간의 정욕이 아니라, 내 평생을 바쳐 찾아 헤맨 깨달음의 마지막 조각이었소. 사람들은 내가 파계를 했다고 돌을 던지겠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가식의 껍질을 벗고 진짜 부처를 만난 기분이오. 당신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안의 참모습을 보았단 말이오.”


​요석은 그의 심장 박동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물었다.


스님, 아니 거사님.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지옥이라 불리는 이 인간 세상의 밑바닥을 전설처럼 걷게 하는 것입니까?”

​원효는 요석의 무릎을 베고 누워,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요석궁의 천장 대신 수년 전 그가 겪었던 거대한 깨달음의 밤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파격적인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이 된 '해골물'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수년 전의 일이오. 나는 도반인 의상과 함께 더 넓은 세상의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향하고 있었지. 신라의 좁은 학문으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소.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밤, 우리는 경기도 어느 들판의 무덤가 근처 동굴에서 하룻밤을 피하기로 했소.”


​원효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해졌다.

요석은 그의 목소리를 따라 어두운 동굴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갈증에 목이 타들어 갔소. 손을 더듬어보니 옆에 바가지 하나가 있더군.

그 안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켰소. 그토록 달콤하고 시원한 물은 내 생애 처음이었지.

세상에 이처럼 맛 좋은 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라며 부처의 자비에 감사하며 깊은 잠에 들었소.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내가 마주한 진실은 처참했소.”


​원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요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어제 내가 감로수처럼 마셨던 것은 바가지에 담긴 정화수가 아니었소. 썩은 물이 고인 해골바가지 속의 핏물 섞인 오물이었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몸은 거부 반응을 일으켰소. 창자를 다 비워낼 듯이 토해냈지. 하지만 바로 그 찰나, 내 머릿속을 거대한 벼락이 치고 지나갔소. 어제 마신 물과 오늘 본 물은 다르지 않았소. 변한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었지.”

​원효의 이야기는 요석의 가슴속에 파동을 일으켰다. 원효는 몸을 일으켜 요석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一切唯心造)이었소.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과 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지. 당나라에 가서 수만 권의 경전을 읽은들, 이 생생한 마음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소. 진짜 공부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덩어리 세상 속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오.”


​요석은 전율했다.

그녀가 평생 지켜온 왕실의 예법과 정숙함이라는 담장이, 원효의 해골물 이야기 앞에서는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려한 궁궐에 살고 있었으나 실상은 고독에 썩어가는 마음의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거사님, 그렇다면 저와의 이 인연도 마음이 지어낸 환상입니까?”


​요석의 떨리는 물음에 원효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환상이 아니라 실체요. 마음이 지어낸 세상이기에 그 안에서 나누는 진심 또한 가장 정직한 법(法)인 것이오. 나는 깨끗한 법당이 오히려 역겨워졌소.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며 자비를 외치는 승려들이, 정작 저잣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신음은 듣지 못하는 것이 가식처럼 느껴졌지. 그래서 나는 부처를 죽이고, 진짜 부처가 머무는 시궁창으로 내려왔소.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이라는 꽃을 발견한 것이오.”

​그날 이후, 요석궁의 사흘은 이 세상과는 단절된 다른 차원의 공간이 되었다.

밖에서는 원효의 행방을 찾는 소동이 일고 있었으나, 담장 안의 두 사람에게는 영원보다 긴 찰나의 시간이었다.

요석은 원효를 위해 정성껏 공양을 올렸고, 원효는 요석에게 글자 대신 마음을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함께 뜰을 거닐며 흙바닥에 막대기로 글자를 끄적이기도 했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흐르는 시간을 만끽했다.

원효는 요석에게 자신의 파계가 단순히 욕망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중생의 삶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음을 고백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타 죽으러 왔소. 우리가 나눈 이 숨결이 재가 되어 흩어질 때, 비로소 나는 ‘거룩한 승려’라는 마지막 껍질마저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오. 공주여, 나를 기다리지 마시오. 나는 이제 당신의 호흡 속에, 그리고 조만간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새로운 생명의 눈동자 속에 늘 있을 것이니 말이오.”


​요석은 그의 말속에 담긴 이별의 예감을 느꼈다. 사흘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원효가 보여준 세상은 담장 너머의 넓은 들판이었고, 그 들판은 이미 그녀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효가 남긴 '해골물의 진리'를 이제 자신의 삶으로 육화(肉化)시켜야 함을 깨달았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요석궁 위로 유난히 붉은 달이 떠올랐다.

원효는 다시 낡은 누더기 옷을 입었다.

화려한 선비의 옷보다 그에게는 흙먼지 묻은 포가 더 잘 어울렸다.

그는 요석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적어주었다.

그것은 글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문양이자 약속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다시 저잣거리의 미친 광대가 될 것이오.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비웃겠지. 하지만 나는 행복하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의 사랑을 얻었고, 그 사랑을 통해 나는 부처보다 더 큰 자비를 배웠소. 당신이 잉태할 그 아이는 내가 깎지 못한 신라의 기둥이 될 것이오.”


​요석은 눈물을 참으며 그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사내는 한 여인의 남편으로 머물기에는 너무도 큰 존재라는 것을. 그는 서라벌 전체의 아버지가 되어야 했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도반이 되어야 했다.


​“가십시오, 거사님. 당신이 가는 그 험한 길에 제 기도가 늘 함께할 것입니다. 담장 밖의 세상이 아무리 험난해도, 당신이 가르쳐준 그 ‘마음의 물’을 기억하며 저 또한 이곳에서 당당히 살아가겠습니다.”


​원효는 주저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새벽안개가 그의 뒷모습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잠시 후, 담장 너머로 익숙하고도 기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었느냐!

나는 이제 하늘을 받칠 기둥을 얻었도다!”


​요석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툇마루에 서서 밤하늘을 보았다.

그녀의 배 속에 깃든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원효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자, 신라의 어두운 밤을 밝힐 새로운 태양의 움직임이었다. 요석은 비로소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효와 함께, 그리고 그가 가르쳐준 드넓은 세상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3화부터는 일반글로 오픈돼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