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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오 Nov 27. 2023

음식 알레르기러도 맛있는 코스요리를 먹고 싶다.

파인다이닝 이용기

버터와 하얀 밀가루로 만든 화이트루에 생크림을 가득 붓고 불을 올리면, 

어느새 반투명한 거품이 올라오며 바글바글 맛있는 소리가 난다. 

거기에 계란 노른자까지 톡하고 올려 주걱으로 저어주면 찰랑이던 거품은 어느새 되직한 크림 소스가 된다. 파르미지아노 치즈를 그라인더로 사각사각 갈아 크림 위를 가득 덮는다. 

파스타에 넣어도 리소또에 넣어도 소위 맛없없 조합. 

손님이 올 때면 내가 자신있게 내놓는 비법 요리 중 하나였다. 



우유알레르기와 계란알레르기가 있으면 멀어지는 음식은 아무래도 양식과 디저트류다. 

크림에는 대부분 우유와 계란이 들어가는데 이건 내게 거부하기 힘든 독약과도 같다. 


그러다보니 알레르기가 생긴 이후 외식 약속이 잡히면, 식당이나 카페는 주로 내가 알아보는 습관이 들었다. 

상대방이 제안한 장소를 따라갔을 때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거나, 아주 제한적이면 

상대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되려 내가 더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런 노하우(?)가 생기기 전, 그러니까 알레르기 진단 초기에 식당 때문에 아주 곤혹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식당예약하다가 억울해서 눈물이 날뻔 한 적은 처음이었달까. 


알레르기, 코로나 등의 건강이슈로 홍역을 치뤘던 우리 부부에게 첫번째 결혼기념일이 도래했다.

우리는 이 날을 아주 특별하게 보내기로 했다. 

스냅촬영도 하고 한강에서 카약도 타고, 밤에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그래서 한강과도 가깝고 적당히 명성도 있는 서래마을의 레스토랑을 레스토랑 예약앱으로 예약했다. 

요청사항에 알레르기 항원들을 기입해 놓았으니 문제가 있으면 미리 연락을 줄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결혼기념일 당일, 스냅촬영 의상과 갈아입을 옷 등을 열심히 준비하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저녁 식사를 예약했던 서래마을의 식당이었다. 

서버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분이 감정요소를 빼고 담백하게 준비된 멘트를 꺼내었다.


"오늘 저녁예약 주신 김고오(가명)님 맞으시죠?
알레르기 있는 음식을 여러 개 적어주셨는데 저희 메뉴 대부분이 생면파스타라서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별로 없거든요." 


이 얘기를 듣는데 가슴 한 구석부터 얼음이 까드득하고 들어찼다. 

의문형으로 끝나지 않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어떤 답을 해야할지 대답을 고르는데 

되려 내 머릿 속에 질문들이 퐁퐁 생겨났다. 

- 그걸 왜 예약 당일에 알려주는 거지? 

- 그럼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한담? 

-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걸까? 


"아 그렇군요. 혹시 제가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전혀 없을까요?" 

"잠시만요. 음, 문어 카르파쵸라고 샐러드만 가능한데 괜찮으세요?"

"리소또도 안될까요? 스테이크는요?" 

"소스에 다 우유나 계란이 조금씩 들어가서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빨리 예약을 취소해. 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라고 종용받는 듯한 느낌. 


"네 그럼 예약 취소할게요. 예약금은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네 취소 처리 해드리겠습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전화는 즉시 끊겼다. 

목소리가 심각했었는지 어느새 다가와 있던 신랑이 물었다. 


"안된대?" 


너무너무너무너무 미안했다. 

둘의 소중한 날 저녁을 보내려고 열심히 찾은 식당. 

나 때문에 신랑도 가고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을 제한받아야 한다니. 정말 속상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무슨 죄인가? 본인은 음식에 아무 제한도 받지 않는데!


"응 미안해. 나때문에..." 


모든 게 내 책임이고 내 몸 때문인 것 같아서 스스로가 싫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신랑은 괜찮다고 다른 곳을 찾아보자며 토닥여주었지만, 

그게 되려 화라락 타고 있는 마음에 장작을 지폈다.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랬다. 

오기가 발동해서 어떻게든 결혼기념일의 마무리를 멋지게 장식해줄 식당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며 

폭풍 검색을 다시 시작했다. 

도산공원에 지중해 요리를 코스로 판매하는 레스토랑이 보인다. 

사진에는 올리브 오일을 사용한 샐러드, 그릴에 구운 생선류가 주로 보인다. 

이번엔 무작정 예약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계란이랑 우유를 비롯한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데 예약해도 괜찮나요?"


전화를 받으신 분은, 요리에 대한 문의이니 쉐프님께 전화를 바꿔 주시겠다고(!) 했다. 

쉐프님은 본인도 우유알레르기가 있다면서 나의 알러지 반응 정도를 가늠하시려는 듯 

이것저것 질문을 해주셨다. 


"혹시 치즈는 괜찮으신가요? 모차렐라 치즈에도 반응이 올라오던가요?" 

"치즈 피자를 먹었을 때 반응이 없었어요! 치즈랑 버터가 요리에 가미된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오세요.
저희 코스 중에 메뉴 두 가지 정도만 소스 변경해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울컥했다고 하면 내 MBTI는 F로 바뀌는 걸까. 

영상통화도 아닌데 머리를 숙여가며 감사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예정되었던 스냅촬영과 한강카약킹을 즐기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직영 농장에서 직접 키운 채소들과 어우러진 해산물류의 코스는 신선하고, 새롭고, 심지어 정말로 맛있었다. 

앞선 전사를 겪지 않았더라도, 맛 하나로 감격이 난무했을 것 같았다. 

오감이 활짝 열리는 즐거운 시간을 요리만으로 만들어주신 쉐프님은, 

우리가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듣고는 서비스 와인까지 내어주셨다. 

알레르기가 있는 손님을 위해 재료 몇 개 바꾸는거 크게 어려운 일 아니라고, 

언제든 오시라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이 고마운 식당은 그렇게 절망할 뻔한 우리 부부의 첫번째 결혼 기념일 저녁을 구해냈(?)다. 


알레르기로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면, 내가 스스로 나서서 내 몸을 지키는 수 밖에 없다. 

폐를 끼치게 되더라도 알레르기가 있음을 밝히고 미리 양해를 구해야한다. 

식당에 요청사항만 적을 것이 아니라, 예약 전에 전화로 문의해야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요식업계에 재료표기 의무가 없는 만큼, 

나의 건강과 시간을 해칠만한 요소는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비건 메뉴, 락토스 프리메뉴가 흔하지 않고 알레르기에 대한 인식이 낮은 우리나라. 

우유알레르기, 계란알레르기 처럼 아주 대중적인 식재료에 민감한 알레르기가 있다면 

스스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보고, 선제적 방어를 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는 음식이 나를 해칠 수 있는 체질이 되어버렸고, 

기념일에 갈 수 있는 멋진 식당이 제한되었고, 

함께 식사하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불편하지만 그 덕분에 작은 배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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