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빙, 좋아하시나요?
설빙이 처음 나왔을 때, 뽀얗게 갈린 우유얼음에 감탄하며
정신없이 빙수를 퍼먹던 때를 추억하는 분, 여럿 있겠죠?
더위를 유독 힘들어하는 남편 때문에라도,
여름이 오면 설빙은 우리의 단골 데이트 장소가 되곤 했다.
그 사이 수박빙수, 망고빙수, 오레오빙수 등 여러 조합이 나왔지만 역시 우리 부부의 최애는 인절미 빙수.
우유와 콩가루, 그리고 사이사이 숨어있는 찹쌀떡을 씹는 재미까지.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다.
떡을 한 두개 밖에 못 먹었는데 빙수 그릇에 남아있는 떡이 없으면, 함께 먹던 상대에게 눈을 흘긴다.
남편과 그런 순간이 오면, 늘 한바탕 웃고는 떡 사리(?)를 리필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즐거운 클리셰였다.
우유 알레르기가 생긴 이후 설빙은 넘을 수 없는 문턱이 되고 말았다.
우유 얼음을 베이스로 하는 설빙에서 우유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라떼는 두유나 오트우유로 옵션 변경이라도 가능하지만 빙수를 대체유로 만들어 파는 곳은 정말 귀했다.
언젠가 경기도의 비건 빵집 한 곳에서 우연히 비건 빙수를 발견한 적이 있다.
직전에 외식을 한 참이라 배가 부른 상태임에도, 환호하며 빙수를 입에 밀어 넣을 만큼 그의 존재는 희귀했다.
(숨을 몰아쉬며 가게를 나왔다는 후문.)
그 해 여름, 남편이 혼자서 양 손 가득 장을 봐오더니 자랑스럽게 빙수용 팥 통조림을 봉지에서 꺼내 들었다.
“내가 우리 여보 빙수 만들어 줄게!”
호기롭게 봉지에서 볶은콩가루와 빙수떡을 마저 꺼내며 콧노래를 부르던 그.
비건 빙수를 처음 만났을 때 식탐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눈이 뒤집혀 빙수 그릇을 긁어먹던 내가 안쓰러웠다고 한다.
“번거롭게 뭘…” 이라며 싱겁게 반응하고 말았지만, 두유 빙수라니!
콩닥콩닥 심장은 제멋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지퍼백에 두유를 넣어 냉동실로 입장시키고는 남편은 내일을 기다리라며 씨익 미소지었다.
대망의 다음날. 꽁꽁 얼린 두유 얼음을 믹서기에 넣고 두유를 더 추가해 갈아주었다.
큰 얼음 덩어리가 잘 갈리지 않아 낑낑대는 남편을 보면서,
얼음 트레이에 얼릴 걸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말을 삼켰다.
얼음만 갈면 두유빙수 만들기 작업의 80%는 끝난다.
잘 갈아낸 두유얼음을 그릇에 담아내고, 팥빙수 팥 캔에서 팥을 큼직한 스푼으로 떠서 탁,
볶은 콩가루를 숟가락으로 넉넉히 퍼내어 솔솔 뿌려 올린다.
원하는 만큼 빙수떡 데코를 올리고, 집에 있던 꿀을 큰 스푼으로 둘러주면 초간단 두유빙수 완성이다.
숟가락을 들고 대기하던 나는, 식탁에 그릇이 놓이자마자 두유빙수를 한 큰 술 가득 떠서 입으로 밀어넣었다.
고소한 두유 얼음이 달콤한 팥소와 시럽을 만나 여느 인절미 빙수 못지 않게 달콤고소한 맛을 낸다.
그릇에 코를 박고 숟가락을 놀리다가 같이 먹는 사람을 찾아 고개를 들자
남편이 숟가락을 든 채 나만 지그시 보고 있었다.
입가의 콩가루를 손가락으로 털어주면서 “다음에 또 해줄게.” 라며 웃는 그.
고마움에 왈칵 눈물이 날 뻔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울다가 빙수가 녹아버리면 안되니까.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어떨까?
음식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건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우유 알레르기를 생기기 전에 내가 최고로 좋아하던 구구크러스트 아이스크림을,
혼자서 냠냠 퍼먹고 있는 남편을 원망하기나 했다.
알레르기 진단 후, 우리집 파스타는 몽땅 오일 아니면 토마토 파스타이다.
우리집 라면은 계란을 넣지 않은 순정(?)라면이다.
혼자서라도 계란프라이를 해먹던 남편은 어느새 장볼 때 계란을 사러 가지 않는다.
일반 카페를 갔을 때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면
그는 다음에 더 맛있는 것을 먹자며 나를 위로한다.
시원 달큰한 이 두유 빙수는 나를 보는 그의 안쓰러움이다.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