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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07. 2021

남자가 쓴 책만 읽었네

어쩌다 보니!

미스터 징글스!





그것은 내가 미리 구상하거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가장 큰 행운을 누리는 소설이 그렇듯이 그것은 한가롭게 거닐다가 제자리로 걸어 들어왔다.


스티븐 킹, <그린 마일> 작가 후기 중


*


아내에게 미스터 징글스 이야기를 매듭짓지 않았노라 지적받았던 것에 착안하여 소설 <그린 마일>은 진중하고 여운 깊게 끝난다. 소소하고 조금 웃음 나는 작가의 후기는 글을 집필할 때 했던 고민들과 시대가 다른 장편을 쓰며 고민되는 시간축, 한 권으로 엮고 나서야 보이는 작은 흠들로 채워져 있다. 그가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따뜻하고 가슴 떨리고 묵지근한 내용을 놀라울 만큼의 긴장감과 호흡으로 조절한 스티븐 킹이, 내게는 그냥 평전 속 위인으로만 보이는 전설적인 작가가 역시나 아내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꼬리를 잡기도 하는 고뇌하고 고심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아는건 기묘한 기분이다. 나는 사실 당신이 신인줄 알았어.

천재적인 스토리텔러,라고 하기에 스티븐 킹 개인이 드러나는 서론이나 후기들은 귀엽기만 하다.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는 분명 매력이 넘치는 괴짜라는 인상이 풍길 것이다.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것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걸어 들어온다고 무슨 낚시찌 내리듯 표현하는 것은 조금 얄밉긴 하다. 사실 글을 쓸 때 '이걸 써야지' 생각했던 걸 착실하게 끌어가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자주 샛길로 빠지고, 완전히 다른 결말로 끝을 낸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은 글도 처음부터 읽어보면 그럭저럭 봐줄만하다. 그래 봤자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글자들이라 그럴 것이다. 사과밭을 보고 싶어 시작했는데 인왕산에서 끝이 난다. 그런데에서 오는 묘미가 있다. 결국 이 글을 타이핑하는 나 역시 튀어나와야만 하는 글자들의 통로일 뿐이라는 기분 좋은 느낌이. 글씨와 문장은 종종 쓰는 사람도 모르게 멋대로 자기주장을 한다. 그래서 재미있고 더 다채로워진다.


9월에 영화 <스탠 바이 미>가 시작이었다. 그 후로 <스티븐 킹 단편집>을 읽었고, <그린 마일>을 읽었다. 데뷔작 <캐리>에는 깊은 인상을 받아 1976년 개봉한  영화 <캐리>와 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2013년 리메이크작 <캐리>를 연달아 보았다. 이 후로 <유혹하는 글쓰기>를 완독 했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의 도서를 몇 권 읽어둔 것은 행운이었다. (어쩌면 영화를 본 것도.)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을 사람은 그의 소설을 몇 권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스티븐 킹의 상상력의 원천, 그의 영감, 사고 과정을 그의 성장 과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다. 그는 영화로 만들고 싶을 수밖에 없도록 글을 쓴다. 고작 네다섯 페이지 만으로도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이런 괴물 같은 소설가의 인간미라니. 그 역시도 두루뭉술하게 시작해 고민하고 혼나며 글을 쓴다니!


하지만 과유 불급이라고, 현재 <미저리>를 마지막으로 읽고 영화 <미저리>를 재관람한 후 넘치는 피와 뇌수와 잔디깎이 기계에 지쳐 잠시 스티븐 킹 탐독을 쉬고 있다. 그 사이에 위스키 공부를 하고,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프레드 울먼의 <동급생>을 읽고, 몇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낭독회를 위한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사실 이 문장은 한 달 전에 대충 찌그려 놓았던 것을 이어 쓰는 것이다. 읽은 지 한참이라 더 적을 내용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의 말마따나 구상도 의도도 상관없이 어떻게든 글은 나오게 되어 있나 보다. 마치 어제 읽은 것처럼 스티븐 킹의 소설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번 주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한 주였다. 지금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절반 정도 읽었다. 위에 늘어놓은 것을 보니 확실히 남자 작가의 책만 줄줄이 읽었구나. 반동처럼 여성 작가들이 쓴 것으로 돌아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번역서를 한도 끝도 없이 읽으면 한국 근대 소설로 돌아오는 것처럼. 사실 지금도 인생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젯밤 브랜디와 보드카에 콜라를 타서 벌컥벌컥 마셨다가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 11일 연근 중 열흘째다. 내일만 근무하면 쉴 수 있다. 다음 주 휴무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메리 셸리의 기이하고 무서운 세상으로 도피한다. 거무죽죽한 2미터 50센티의 괴물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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